[청년발언대]

초등학교 시절 ‘입술 빠는’ 버릇이 있었다. 겨울철 날씨가 건조해지면 입술이 메마르는데 그게 싫어 혀를 쭉 내밀어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한 바퀴 훑곤 했다. 입술에 침을 잔뜩 묻히면 잠깐 촉촉해진다. 그러나 조금 뒤 침이 마르면 더 건조해진다. 이 행동을 무한반복하면 입술이 두배로 커진다. 화장이 서툰 여자의 립스틱 오버화장처럼 입 주위가 붉게 물든다.

다른 안 좋은 습관도 있었다. 이빨을 닦을 때 항상 좌삼삼 우삼삼 하거나, 코를 후빌 때 오른손 다섯 번, 왼손 다섯 번 하는 식으로 균형을 맞춰야 했다. 길을 걸으며 보도블록 사이 경계선을 절대 밟지 않는다든가, TV채널을 돌릴 때 6번을 볼 때면 반드시 7번을 거쳐서 리모컨을 돌렸다. 7은 행운의 숫자, 6은 악마의 숫자라는 말을 어디선가 듣고 그때부터 생긴 버릇이다.

다행히 이런 것들은 중학생이 되면서 없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정서불안 때문에 생겨난 버릇이다. 지금은 추억이지만 당시에는 대단한 고통이었다. ‘입술 두 개’라고 놀려대는 학우들에게 주먹감자를 먹이곤 했지만, 겨울은 몸과 마음 모두 추운 시기였다.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형벌에서 벗어나기 위해 입술에 꿀을 바르던가, 바세린을 발랐지만 습관의 힘에 굴복해 입술빨기는 한동안 계속됐다.

한 네티즌이 만든 ‘헬조선 지옥불반도’ 지도. 젊은 세대들에게 지옥 같은 한국의 상황을 풍자해 인기를 끌었다. ⓒinven.co.kr

헬조선, 정치 환멸…나쁜 버릇에 익숙해진 국민들

습관이란 무섭다. 내 몸이 의지와 상관없이 행동하는데 막을 수가 없다. 조금만 꾹 참으면 되는데 찰나의 유혹을 견디기 쉽지 않다. 나쁜 버릇을 되풀이하다 보면 어느새 익숙해진다. 무뎌지고 길들여지고 실수를 반복해도 부끄럽지 않게 된다. 동물에게 수년간 목줄을 매 놓으면 줄을 풀어놔도 일정 범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요즘 우리는 무엇에 익숙해지고 있는가. 일단 ‘헬조선(Hell+朝鮮)’이 눈에 띈다. 취업난·전세난 등 지옥 같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만들어낸 신조어다. 여기저기 헬조선이란 말이 튀어나오고 거부감 없이 소비된다.

‘OO충’에도 익숙해지고 있다. 맘충, 한남충, 급식충, 일베충 등 멀쩡한 단어에 벌레라는 의미의 충(蟲)을 붙여 대상에 혐오를 드러내는 신조어들이 인터넷 공간을 뒤덮고 있다. 맘충은 ‘자기 아이만 아는 몰지각한 엄마’를, 한남충은 ‘가부장적이고 여성을 배려할 줄 모르는 한국 남성’을 뜻한다. 초중고 학생은 급식을 먹는다는 이유로 ‘급식충’으로 부르고, 매사 진지하게 설명하려 드는 사람들은 ‘설명충’으로 비하한다.

‘상식 없는 사회’에도 적응하고 있다. 일반인들의 상식 수준에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가수 조영남은 남이 그려준 그림을 자기 작품인양 수천만원에 팔았고,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의 변호사들은 사건 1개당 50억원씩을 수임료로 챙겼다. 대우조선해양은 지난해 말 부채가 18조6000억원, 부채 비율이 7308%로 회복불가 수준인데도 최근 ‘낙하산’ 인사를 꽂으려다 들통났고, 정부는 미세먼지를 잡겠다며 경유세 인상 뜬금포를 쐈다가 역풍을 맞았다.

‘정치불신’도 심각하다. 20~30대 청년들은 대부분 정치를 싫어한다. 아니 관심조차 없다. 정치 뉴스 볼 시간에 주말에 놓친 TV 예능 다시보기나 밀린 빨래라도 하는 편이 낫다. 정치는 매번 똑같은 레퍼토리의 반복인데다 치열한 갑론을박을 벌여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머리끄덩이 잡고 싸우다가도 적당히 타협하겠지, 부자들만 배불리고 서민들은 쥐어짜겠지 단정 짓는다. 청년들이 정치에서 멀어지는 건 인생살이에 하등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상한 짓을 하도 반복하니 이제 그런가 보다 한다.

나쁜 버릇을 되풀이하다 보면 부끄럽지 않게 된다. 부조리한 현실에 침묵하는 대신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 ©픽사베이

현실에 침묵하는 대신 제 목소리 내야

익숙해진다는 건 그 현상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좋은 습관에 익숙해지는 건 상관없지만 나쁜 습관에 익숙해지는 건 위험하다. 나쁜 버릇을 되풀이하다 보면 무뎌지고 길들여지고 부끄럽지 않게 된다. “헬조선이니까 그렇지 뭐”, “정치권이 그렇지 뭐”, “부자들이 그렇지 뭐” 하고 자포자기하면 부조리한 현실을 바꿀 의지조차 사라진다. 미리 예단하고 체념하고 도전하지 않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바뀌려면 어떡해야 할까. 우선 스스로 불편함을 자각하는 게 중요하다. 중학생이 되면서 입술 빨기를 멈춘 계기는 ‘쪽팔림’이었다. 중학교에서도 놀림 받으면 안 된다, 나이 들었는데 철없이 굴어선 안 된다는 생각을 자꾸 하니 어느새 습관이 고쳐졌다. 버릇이 없어지니 주위 시선이 달라지고 이를 의식하니 힘들어도 참을 수 있었다. 처음 한 고비만 넘기면 다음은 훨씬 수월하다.

부조리한 현실에도 침묵하는 대신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양극화, 청년실업 등 각종 이슈에 대해 한국 사회는 절망적이라고 징징대지만 말고, 약자들의 분노를 변화의 에너지로 바꿔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일본 학생행동단체 실즈는 아베 정부의 안보법 통과에 반대하며 새로운 사회 운동을 시작했다. 스페인 포데모스는 온라인 토론과 지역운동 등으로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며 창당 2년 만에 제3당으로 떠올랐다. 우리나라도 이런 움직임이 충분히 생겨날 수 있다.

한때 한국사회는 ‘하면 된다’는 열정의 신화가 가득했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를 몰랐고, 실제 반복된 실패를 딛고 성공사례를 양산했다. 결국 현실을 바꾸는 것은 행동이다. 포기하면 몸은 편할지 몰라도 정신은 병든다. 체념하고 외면하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오피니언타임스=박형재]

 박형재

 오피니언타임스 기자 

 전 세계일보 로컬세계 기자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