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철의 석탑 그늘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의 ‘한일 국보 반가사유상의 만남’ 특별전이 지난 12일 끝났다. 우리나라의 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과 일본 나라현의 주구지(中宮寺) 목조반가사유상이 주인공이었다. 두 불상은 이제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미소의 부처-두 점의 반가사유상’이라 이름 붙여진 일본 특별전은 21일부터 2주일 동안 열린다. 두 나라의 국보급 사유상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였으니 분명 뜻깊다.

우리나라 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있다. ©포커스뉴스

쓸쓸하게 끝난 한일 반가사유상의 만남

이 전시회를 보려고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은 것은 월요일인 지난달 30일이었다. 중앙박물관은 월요일마다 문을 닫지만, 반가사유상 특별전은 쉬는 날 없이 열렸다. 그런데 특별전이 열리는 본관 앞 기획전시실은 썰렁하기만 했다. 두 사유상이 마주 보고 있는 전시장에는 방호원을 빼고 관람객은 필자를 포함해 둘 뿐이었다.

다른 한 사람도 돗수 높은 안경을 끼고 한참이나 관찰하는 폼새에서 전공 분야가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관련 분야 학자의 향취가 풍겼다. 필자도 어쩌다 문화유산 분야 주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으니 사유상 구경을 하는 30분 남짓 동안 일반 관람객은 아무도 없고 두 사람처럼 직업적 관심을 가진 관람객만 있었던 셈이다.

온 나라 언론이 “엄청난 전시회”라고 그토록 떠들어 댄 전시회였다. 그럼에도 특별전이 인기가 없을 것으로는 벌써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휴관일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전시회는 인기가 너무 없었다. 78호 사유상과 주구지 사유상으로 ‘일본 콤플렉스’를 자극하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라는 짐작은 현실이 됐다. 그런데 짐작 이상으로 관람객이 없었다는 것은 일본 콤플렉스가 그만큼 심각한 상태라는 뜻이 아닌가.

일본의 국보 주구사 목조반가사유상. ©포커스뉴스

한국은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과 고류지의 목조반가사유상 전시 기대

한일 반가사유상 특별전이 열린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국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과 역시 일본의 국보라는 고류지(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실제 두 사유상이 나왔다면 전시장은 미어터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지 않아도 중앙박물관이 당초 광복 50주년 기념전을 추진할 때도 염두에 두었던 대상은 두 반가상이었다. 중첩된 듯 이어진 부드러운 원형의 산봉우리군(群)을 연상케 하는 보관을 머리에 쓴 두 반가사유상이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고류지 사유상은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1945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인간 존재의 가장 정화되고 원만하며 가장 영원한 모습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고 찬사를 보냈던 바로 그 불상이다. 야스퍼스 발언에 우쭐한 것은 일본보다 오히려 한국이었던 것 같다. 고류지 사유상은 83호 사유상과 너무나도 똑같이 생겼으니 분명 한국에서 건너간 것이라는 인식은 지금도 국내에 널리 퍼져 있다.

그러니 국내에서는 “야스퍼스가 ‘원본’(原本)인 한국의 83호 사유상을 봤다면 더욱 극찬했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추측 역시 아직까지도 난무한다. 나아가 우리가 우리 사유상을 제대로 평가하기 시작한 것도 교류지 사유상에 대한 야스퍼스의 인식이 불필요한 기대와 맞물린 일종의 ‘쓰리 쿠션’식 영향력을 발휘한 결과는 아닌지 혼자서 곰곰히 생각해 본 적도 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필자는 야스퍼스를 거론하면서도 그가 독일의 철학자라는 것만 알지 그 철학의 요체는 모른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야스퍼스를 아는 것도 필자처럼 실존철학 때문이 아니라 사유상 때문은 아닌지….

문화는 교류하며 발전한다. 일본 콤플렉스에 매몰돼선 안 된다.©픽사베이

한국, 반가상 통해 일본에 전해준 문화의 실체 확인하려 해

한 마디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83호와 고류지 반가상을 한 자리에서 보고 싶다는 욕구는 한일 두 나라의 문화를 한 자리에서 비교해 보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다. 정직하게 말해 한국이 일본에 전해준 문화의 실체를 확인하겠다는 욕구에 다름 아닐 뿐이다. 그렇다면 일본이 바보가 아닌 이상 국가기관인 국립도쿄박물관이 참여하는 특별전에 고류지 사유상을 내보낼 가능성은 처음부터 전혀 없었다고 봐야 한다.

사유상 특별전이 여전히 ‘한일 수교 50주년 기념’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한일 수교는 1965년이었으니 올해는 51주년이다. 그럼에도 시제(時制)에 맞지 않는 부제가 달린 것은 사유상을 주제로 하되 구체적으로 어떤 사유상을 전시할 것인가를 둘러싼 두 나라의 줄다리기가 해를 넘길 정도로 쉽지 않았다는 뜻이다. 우리는 고류지 것을 줄기차게 요구한 반면 일본으로서는 그것만 아니면 됐다.

결국 최종 출품작을 보면 협상에서 한국이 일본에 양보할 수 밖에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특별전 자체가 ‘없었던 일’이 됐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일본은 우리나라 일각의 주장처럼 ‘한국에서 만든 사유상’이거나 ‘한국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사유상’인 고류지 것이 아닌 6세기 후반 한국 사유상의 영향을 재해석해 일본화(日本化)를 이룬 7세기 후반 주구지 사유상을 내놓는 사실상의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 문화는 모두 한국에서 건너간 것’이라고 주장하는 순간 ‘한국 문화는 모두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 된다. ©픽사베이

문화는 교류하며 발전… 일본 콤플렉스에 매몰돼선 안 돼

문화란 흐르는 것이다. 교류하면서 발전한다. 한국은 근세의 일본 콤플렉스가 지워지지 않은 탓에 ‘일본 문화는 모두 한국에서 건너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렇게 우기는 순간 ‘한국 문화는 모두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 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쉬쉬하고 있을 뿐 우리가 매우 귀중하게 여기는 불상 가운데는 중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는 것도 적지 않다. 운반이 쉬운 소형 불상은 더욱 그렇다.

한국의 반가사유상은 인도에서 출발한 불교와 불교미술의 역사가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에 전해진 뒤 한반도로 건너온 것이다. 그것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그렇게 인도에서는 인도의 미의식, 중국에서는 중국의 미의식, 한국에서는 한국의 미의식, 일본에서는 일본의 미의식을 꽃피운 불상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인도, 중국, 한국, 일본 특유의 미의식이 담긴 불상이 아름다운 것이다.

고류지 사유상이 한국에서 자란 소나무를 재료로 썼다는 연구 결과가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곧 한국인이 만들었다는 증거라고 하기는 어렵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관의 재료가 일본산 금송이라고 백제의 장례문화가 모조리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라고는 일본 학계에서도 주장하지 않는다. 실제로 고류지 사유상은 83호 사유상과 닮았지만, 한국 사유상의 영향을 받아 초기 단계의 일본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필자도 고류지 사유상에는 일본의 미의식이 담겼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반가사유상 특별전은 일본측 의사가 관철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자체로 매우 가치가 높은 전시회다. 주구지 사유상이 일본의 미의식을 완성감 높게 담은 뛰어난 작품이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너무나도 뚜렷한 한국 사유상의 영향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83호와 고류지 사유상이 전시됐다면 관람객들은 정치적 시각에 얽매여 고대 동아시아 문화사의 흐름을 읽는 기회를 오히려 놓치지 않았을까 싶다. 백해무익한 일본 콤플렉스가 지금도 우리 역사와 문화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오피니언타임스=서동철]

 서동철

 서울신문 수석논설위원

 문화재위원회 위원

 국립민속박물관 운영자문위원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