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문화로 사는 세상]

평균 수명이 나날이 늘어 내남없이 여든까지는 사는 게 여사인 고령화세상.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서 보면 아직도 살아가야 할 날들이 까마득하다. 그나마 경제적으로 넉넉해 더 이상 ‘밥벌이’를 계속하지 않으면 다행이련만, 아직도 자식들이 학교 다니고, 졸업했는데 취직도 못하고 있으면 어디서든, 무엇이든 해야 한다. 그 구차함과 고단함과 지겨움이란.

설령 모아놓은 돈이 많거나, 연금을 넉넉하게 받거나, 자식들이 푸짐하게 주는 용돈이 있어서 그냥 놀아도 된다고 하자. 그것만으로 여생이 편안하고 즐거운 ‘백세인생’이 된다면야 얼마나 좋으랴. 일흔이 되면 지식의 높낮이가 없어지고, 여든이 되면 돈의 많고 적음이 무의미해 진다는 말도 있다.

벌써 10여 년 전에 들은 이야기다. “친구 네 명이서 나오다가, 어느 날 세 명이 되더니, 조금 지나니까 아무도 안 보이고, 그 뒤에는 아들이 나와요. 같이 운동할 사람이 없으니 아들한테 회원권을 준 거죠.” 서울 근교, 회원가가 비싸기로 소문난 명문 골프장의 캐디가 해준 말이다. 아무리 돈이 많으면 뭐하나. 둘만 남아도 골프장에 갈 수 없다.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포스터 ©tvN 홈페이지

드라마가 말하는 ‘디어 마이 프렌즈’의 조건

등장인물 평균 나이와 그 역을 맡은 배우들의 평균 나이가 모두 70세가 넘는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는 말한다. 그 나이에는 아들, 딸, 남편과 아내보다 친구들이 있어야 한다고. 친구가 제일이라고. 꼭 문정아(나문희)와 조희자(김혜자)처럼 또래가 아니어도 좋다. 열 살 가까이 차이 나는 오충남(윤여정)이나 장난희(고두심)같은 ‘동생’ ‘언니’ 하는 선후배 사이라도 괜찮다. 늙으면 친구의 조건은 ‘사이’와 ‘나이’가 아니라 ‘시간’과 ‘거리’이다. 아무리 친했던 친구라도 멀리 있으면 소용없고, 아무리 나이가 같아도 함께 한 시간이 많지 않으면 편하지 않다.

‘디어 마이 프렌즈’의 주인공들은 이 조건들을 갖췄다. 문정아와 조희자는 둘도 없는 친구이고, 오충남은 그들을 친언니처럼 따르는 후배이고, 영원(박원순)의 절친이며, 영원은 장난희(고두심)와 단짝 친구다. 그들은 서로 무슨 일이 있으면 금방 달려올 수 있는 멀지 않은 곳에 남편과 혹은 혼자 살고 있으며, 같은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 물론 나이만큼이나 ‘디어 프렌즈’로 오래 지냈다.

지금 무슨 일을 하든, 남편과 자식이 있든 없든, 과거에 얼마나 고생을 했건, 그들은 연금 몇 푼에 의존해 쪽방에서 겨우 끼니만 이어가는 비참한 사람들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드라마에서 그들을 만날 수도 없다. ‘디어 마이 프렌즈’는 그 일차적 행복 위에서 이집 저집, 이 식구 저 식구의 현재와 과거의 삶, 관계, 그것으로 인해 벌어지는 얽히는 갈등과 화해를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되고, 마음 맞고, 함께한 세월이 많아도 개성이 다르고, 살아온 시간이 다르고, 지금 앓고 있는 마음의 상처가 다른 그들이 ‘디어 프렌즈’가 되는 것은 쉽지 않다. 드라마야 이렇게 노년의 배우들을 다 모아서 친구로 만들면 되지만 현실은 어디 그런가. 그저 ‘로망’일 뿐이다.

©픽사베이

고령화사회의 두려움, 죽기까지의 나날들

그 로망이 이루진다 하더라도 어느 날 그마저도 소용없는 쓸쓸하고, 아프고, 슬픈 노년들. 오래 살게 되면서 더욱 두려운 그 시간들. ‘디어 마이 프렌즈’도 결국에는 그곳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조희자의 치매와 장난희의 암은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이다. 드라마라고, 디어 프렌즈의 꿈만 꿀 수는 없다.

조희자에게 이제 남은 나날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장난희는 죽을 때까지 얼마나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할까.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으니 조희자는 이따금 기억을 잃고, 거리를 해매더라도 육체적 건강이 무너지지 않은 한 살아갈 것이다. 장난희 역시 아무리 암이 말기라 하더라도 의학으로 그것을 붙잡아 놓은 채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어쩌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나날을 죽을 때까지 끌고 가야 할지도 모른다.

장난희와 조희자 뿐이랴. 드라마만일까. 마이 디어 프렌드의 어머니도 장난희이고, 마이 시스터도 조희자이다. 친구와 가족은 물론 자신의 시간과 기억까지 잃어버리는 노인들, 아무리 고통을 참아도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약으로 고통을 버티며 남은 날을 병상에 누워있는 노인들. 전국에 널려 있는 요양원, 병원에 가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우리의 고령화사회는 한편으로는 이렇게 슬픈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무릎이 아파 잘 걷지 못하는 어머니는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기도한다. “치매가 오기 전에, 암이라도 걸리기 전에, 잠자다가 그대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 날이 내일이어도 상관없다”고. 죽음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보다 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 앞의 시간들이 더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고령화 사회임을 생각하면 아직 청년인 나도 벌써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니 하물며 아버지, 어머니들은 말해 무엇하랴.

노년에는 건강이 최고의 권력이고, 편안한 죽음이 가장 큰 복이다. 그러나 그 ‘무병장수’가 어디 뜻대로 되는 일인가.[오피니언타임스=이대현]

 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전 한국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저서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14세 소년, 극장에 가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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