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에서 쓰는 편지]

교장실 칠판에는 97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오늘의 총 학생 수’였습니다. 안내를 담당한 선생님은, 많을 때는 재학생이 1500명이나 됐다고 지난날을 추억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97이라는 숫자조차 가벼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닷가 작은 면소재지의 중학교에 아직도 학생이 이만큼이나 남아있다니…. 마침 수업시간이라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학교 건물이 더욱 커보였습니다. 정말 학생들이 있기는 한 걸까? 초여름 햇살이 유난히 날카롭게 쏟아지는 날이었습니다.

시인·가수와 하나 된 시골 중학교의 싱그러운 아이들을 보며, 아이들이 희망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사진은 굿네이버스 ‘아프리카 희망학교 체험전’에 참여한 초등학생들 ©포커스뉴스

시인·가수와 하나 된 시골 중학교의 싱그러운 아이들

전라남도 해남의 한 중학교로 시를 읽어주러 갔던 날의 이야기입니다. 시인과 가수, 학생들이 어울려 시를 읽고 함께 노래하는 자리였습니다. 사실 도착할 때까지도 별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공부에 치여 사는 요즘 학생들이 시에 관심이 있을까? 관심까지는 몰라도 그리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딱딱한 시간이나 되는 건 아닐까 불안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행사장으로 가는 복도에서 학생들과 처음 마주쳤습니다. 맨 먼저 받은 인상은 아이들이 예상 밖으로 밝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발랄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는지, 풀잎에 맺힌 아침 이슬을 보는 것처럼 싱그러웠습니다. 도시 학교에서 보았던 피곤하고 찌든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가는 길에 가졌던 제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은, 행사가 시작되자마자 알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 자체가 시였습니다. 진지하게 듣고 감동을 표현할 줄 알았습니다. 바람과 구름과 산과 나무가 시를 가르쳤구나. 혼자 중얼거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수들이 노래를 부를 때는 함께 부르고 환호했습니다. 도시 아이들과 문화의 격차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인과 가수와 아이들은 어느덧 하나가 돼 있었습니다. 시를 읽어주러 간 시인들이 위로를 받는 자리였습니다. 아이들이 희망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농어촌의 공동화에 대해 한 마디씩 거들고, 곧 세상에서 지워질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아이들이 있는 한 희망의 불씨는 꺼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픽사베이

계속되는 출산율 하락에 결혼 기피 풍조··· 미래가 사라지는 것 아닌지

서울로 돌아오니 답답한 뉴스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 통계청이 발표한 4월 인구동향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요지는 올 4월에 태어난 아기들이 3만5300명으로, 월별 출생아 수를 집계한 2000년 이후 가장 적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작년 4월에 비하면 7.3%나 감소한 수치입니다. 출산율 하락의 직접적인 원인은 결혼하는 젊은이들이 줄어드는 데 있습니다. 지난 4월의 결혼 건수는 2만2800건으로 1년 전보다 7.7% 줄었다고 합니다. 이 수치는 역대 4월 결혼 건수 중 두 번째로 적은 것입니다. 결혼 적령기인 20~30대 인구가 감소한 탓도 있지만, 우리 사회에 결혼 자체를 기피하는 풍조가 만연한 게 결정적 이유입니다.

결혼기피 풍조는 어제 오늘 일은 아닙니다. 경기 불황에 따른 취업난과 주택난 등으로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다는 ‘3포 세대’라는 말이 나온 지 꽤 오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내 집’과 ‘인간관계’까지 포기한다는 ‘5포 세대’라는 말이 등장하더니 언제인가부터는 ‘꿈과 희망’, 그리고 ‘모든 삶의 가치’를 포기한다는 ‘N포 세대’라는 말이 낯설지 않게 됐습니다. 이를 증명하듯 결혼하는 나이도 계속 늦어지고 있습니다. 남성의 평균 초혼연령은 2004년 30세를 넘어섰고, 여성은 2015년 30세에 들어섰습니다. 조사를 시작한 1993년과 비교해 볼 때 평균 5세 이상 늦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결혼기피 풍조의 배경에는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고 싶다든지, 경제 사정과 상관없이 가정이란 틀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는 등의 이유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제 주변에도 10년 넘게 연애를 하면서 결혼은 하지 않는 젊은 친구들이 꽤 있습니다. 더 이상 결혼을 인생의 필수 과정으로 보지 않는 것이지요. 결혼을 하지 않는데 아이들이 늘어날 리는 없습니다. 문제는 아이들이 없는 세상은 희망이 없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희망이 없다는 말은 차라리 낭만적입니다. 재앙이란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결혼 기피, 저출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나라의 미래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경제를 지탱하기 위한 최소한의 소비나 노동력 같은 문제를 넘어, 국가가 존속하기 위한 최우선 조건이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교훈은 여전히 금과옥조입니다. 구호가 아닌 실질적 대책이 절실한 때입니다. 물론 결혼과 출산을 늘린다는 게 하루 이틀에 해결되는 일은 아니겠지요. 취업률을 높이고 주택 보급을 늘리고 육아 복지를 확충하기 위해서는 경기 회복이 필수 조건인데, 그야말로 의지만으로 이뤄지는 문제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식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미래가 사라지고 있다’는 위기의식의 공유 같은 것 말이지요. 물론 정부의 가시적인 대책이 시급하다는 건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축복이 되는 사회적 풍조를 되찾아야 합니다.

암울한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바닷가 마을의 중학교에서 만났던 아이들을 생각합니다. 냇둑의 봄풀처럼 푸른 목소리와 맑게 빛나던 눈동자, 티 없는 웃음…. 우리들의 희망이 거기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아이들만이 희망입니다.[오피니언타임스=이호준]

 이호준

 시인·여행작가·에세이스트 

 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문명의 고향 티크리스 강을 걷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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