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선의 너영나영]

도널드 트럼프를 잘못 봤다. 트럼프가 ‘옳다’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맞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Brexit) 투표를 보니 확실히 알겠다. 트럼프 현상과 브렉시트 투표 결과는 판박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게티이미지/포커스뉴스

트럼프 현상과 브렉시트의 뿌리는 저소득층의 좌절감

전 세계의 언론은 미 대통령 공화당 후보 선거에 나온 트럼프를 막말이나 하는 극우 성향의 포퓰리스트(대중 영합주의자)라고 비웃었다. 하지만 그는 저소득·저학력층의 정서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트럼프의 정책은 불평등과 빈부격차가 점점 심화하는 미국 사회에서 생존권적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는 멕시코인과 무슬림을 잠재적인 불법 취업자나 범죄자로 취급하며 입국을 통제하자고 주장했다. 부자 증세, 중산층 감세, 법인세 인하, 저소득층 세율 0%, 최상위층 세금공제 폐지 등의 공약을 내걸었다. 사회주의 성향의 버니 샌더스는 세금 정책은 트럼프와 유사했지만 인종차별 철폐, 성적 소수자 권리 향상 같은 정책을 내걸었다는 점에서 트럼프와 달랐다.

브렉시트는 트럼프를 비웃으면 안 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영국의 가디언지와 미국 뉴욕타임스 등의 분석에 따르면 영국의 저소득·저학력층이 브렉시트를 압도적으로 지지한 저변에는 일자리와 복지를 위협하는 반 이민정서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정서의 뿌리에는 빈부격차라는 좌절감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트럼프 지지 계층의 정서와 같다.

트럼프를 우습게 여기고, 브렉시트가 부결될 것이라고 믿은 것은 언론과 기득권층의 실패다. 언론과 기득권층은 자신의 눈, 곧 자신의 이익과 가치관을 기준으로 미국과 영국 사회를 겉핥기 식으로 보았을 뿐 바닥 정서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저소득·저학력층의 박탈감과 좌절을 보려 하지 않았다.

비단 미국과 영국뿐이 아니다. 최근 오스트리아, 헝가리, 노르웨이, 그리스 등 유럽 전역에서 극우 정당이 약진하고 있다. 21세기 극우파의 공통점은 일자리와 부를 빼앗아 가는 외국인과 이민자들에 대한 중·하위 계층의 분노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와 경제 위기는 빈부격차와 실업을 확대하고 중산층을 붕괴시켰다. 여기에다 인기영합적 정치인들이 저소득층에 대한 세금 감면 등의 포퓰리즘 정책으로 세를 확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달 30일 서울지하철 구의역 내에 마련된 스크린도어 사망사고 추모 장소에 고인을 추모하는 쪽지와 국화가 놓여있다. ©포커스뉴스

구의역 참사와 강남역 여성 피살 사건에 투영된 소외계층과 여성들의 분노

우리나라도 심상치 않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19세 청년이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안전 규정도 지키지 않는 현장에서 일하다 비참하게 숨진 구의역 사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고 분노한 것은 인도주의적 감정을 넘어 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대신해 희생된 것일 수도 있다고 여긴 것이다. 강남역 화장실에서 살해된 여성에 대한 전국적인 추모 열기도 우리사회 여성들의 폭력에 대한 불안감과 억압된 분노가 표출된 것이다.

최근 3당 교섭단체 대표가 20대 국회 개원 연설에서 격차(불평등) 해소를 우리 사회의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특히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제 분배 문제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정부와 여당의 경제 정책 변화의 단초를 보여주는 것으로 기대를 갖게 했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는 미국보다도 심각하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최근 한 포럼에서 “우리 정부의 소득재분배 기능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낮아 소비 침체를 유발하고 저성장의 원인이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진단했다.

얼마 전에는 전 국민에게 월 300만원의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스위스 헌법 개정안이 보도됐다. 예전 같았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화제에 올리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비록 국민투표에서 부결되기는 했지만,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양극화 사회에서 과연 인간의 존엄한 삶이 보장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세계의 이목을 끌게 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기본소득제를 한번 실험해 봤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기본소득제에 대한 논의는 더 계속될 것이다.

브렉시트 결정에 유럽연합도 흔들리고 있다. ⓒ게티이미지/포커스뉴스

미 불평등 연구가, “효율성과 평등은 역의 관계가 아닌 보완재” 주장

불평등 연구의 대가(大家)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의 신간 ‘미국 경제 규칙 다시 쓰기(Rewriting the Rules of the American Economy)’도 눈여겨 볼만하다. 동국대 이영환 교수에 따르면 스티글리츠는 성장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불평등을 감수해야 한다는 ‘효율성과 평등 간의 관계’에 대한 종전의 견해를 반박한다. 평등과 경제적 성과는 역의 관계나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라고 주장한다. 그는 중산층을 두텁게 육성하는 새로운 규칙들을 만들어 성장과 불평등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는 제안한다.

우리나라는 소득 분배의 악화와 빈부의 세습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수저계급론’, ‘헬조선’,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같은 말이 회자되는 것은 젊은이들이 희망을 잃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의 저변에는 분노와 좌절감이 쌓여가고 있다. 구의역 참사와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에서 보듯이, 소외계층의 정서를 건드리는 사건이 일어나면 한순간에 전국적으로 공감대가 형성된다. 이는 어느 정치 지도자도 자칫 잘못하면 한 번에 훅 갈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부디 여야가 정치력을 발휘해 양극화를 줄이는 구체적인 해법과 대안을 마련했으면 한다. 내년 대통령 선거의 승리는 어느 정당과 지도자가 불평등 해소를 위한 차별화된 정책과 경쟁으로 국민의 마음을 선점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오피니언타임스=황진선]

 황진선

 오피니언타임스 편집인

 가톨릭언론인협의회 회장

 전 서울신문 사회부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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