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다정한 친구들과 한잔 술 나누다가 주흥이 오르면 으레 한 두 곡의 옛 노래가 저절로 흥얼거려진다. 이러한 경우 대개 노래방이 있는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모니터에 떠오르는 가사를 보면서 마이크로 소리를 꽥꽥 질러대는 풍경이 요즘 세태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앉은자리에서 그대로 눈을 지그시 감고 기억하는 노래들을 잇달아 불러대곤 했다. 이때 반드시 중심적 역할을 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를 에워싸고 모두들 합창으로 분위기를 달구었다. 이제 이런 모습들을 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 시절에 자주 부르던 노래 중에 우리는 ‘비 내리는 고모령’(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럭키레코드사, 1947)을 떠올린다. 일단 가사부터 한번 음미해보자.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넘어 오던 그날 밤이 그리웁고나
-‘비 내리는 고모령’ 1절 가사

©이동순

작품의 시적화자는 현재 고향을 떠나 머나먼 타향에 있다. 그곳이 국내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해외일 수도 있다. 식민지 시절이었으면 일본, 중국, 만주, 연해주, 사할린, 남양군도 등지였으리라. 그곳에서 주인공은 떠나온 고향집과 어머니, 작별하던 날 고향집 뒷산에서 유난히 크게 울던 부엉새 소리, 어머님과 헤어지던 고향의 가을 언덕길과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던 가랑잎들, 추억으로 가득한 물방앗간 등을 사무치도록 그리워한다. 유난히 굴곡도 많았던 한국현대사를 통해 우리 민족은 숱한 억압과 유린, 상처와 모멸의 시간을 겪었다. 가족이 한집에서 편안히 살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은 전혀 보장되지 못했다.

지원병이란 이름으로 일본군대에, 징용이란 이름으로 일본의 탄광과 군수공장, 혹은 비행장 활주로 공사장에, 정신대란 이름으로 일본군 위안부의 흉측한 역할을 강요받았다. 만리타국에 백골을 묻고 무주고혼(無主孤魂)되어 비 오는 날 그 혼백이 꺼이꺼이 울며 헤매고 다니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을까? 그들에게 가장 절대적인 귀착지(歸着地)는 오로지 고향이란 두 글자였다.

맨드라미 피고 지고 몇 해이던가
물방앗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어이해서 못 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 내리는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비 내리는 고모령’ 2절 가사

©이동순

필자가 사는 곳은 이 고모령에서 가깝다. 예전에는 경산 소속이었지만 현재는 대구시 수성구 고모동으로 바뀐 이곳에는 폐쇄된 고모역 건물이 남아있다. 이곳에서 인터불고호텔 쪽으로 조금 더 가면 야트막한 언덕길이 하나 눈앞에 나타나는데 주민들은 이곳을 고모령이라고 부른다. 하필 한자가 돌아볼 고(顧), 어미 모(母)로 합쳐진 말이니 길 떠나는 아들을 배웅하던 모자간은 대개 이 고모령 부근에서 작별을 했던 것인가.

작사가 유호(본명 유해준)는 광복 직후 부산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을 향해 가던 길이었다. 당시 증기기관차의 연료는 석탄이었고, 보일러에 물을 끓여서 그 증기의 힘으로 열차의 엔진은 움직였다. 급행열차를 먼저 보내주려고 대구 가까운 고모역에 열차가 대기하고 있던 중 유호는 가랑비 뿌리는 창밖으로 어머니와 아들의 이별장면을 보았다. 아들은 어디 먼 길을 떠나는 행색이었고, 어머니는 줄곧 아들 옆을 따라가며 무어라 신신당부의 걱정 어린 말씀을 하는데 거리가 멀어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 아들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맨드라미는 비름과에 속하는 일년생 초본식물인데, 그 모양이 마치 수탉의 벼슬처럼 생겼다고 해서 닭벼슬꽃, 혹은 한자말로 계관화(鷄冠花)라고도 불렀다. 한국인 가정의 집 마당에 가장 흔히 뿌렸던 친근한 꽃 가운데 하나다. 만리타국에 가 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꽃이 맨드라미, 봉숭아, 채송화, 금잔화 등이었으리라. 고향에서의 유소년 시절, 가슴 두근거리는 첫사랑을 맺었던 애틋한 추억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더욱 새롭기만 했으리라. 농촌에서의 첫사랑은 대개 마을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서 물레방아가 있던 은밀한 장소에서 인적이 드문 밤에 몰래 이루어졌을 것임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사랑이 얼마나 짜릿하고 절절한 것이었을까?

작품의 시적화자는 민족사의 험난한 세월 속에서 만리타국으로 떠나가 있다. 고향에 돌아오고 싶어도 여러 정황들이 쉽게 귀향을 허락하지 않는다. 다만 고향에서의 달콤했던 추억만을 떠올리며 한없이 그 시절을 그리워할 뿐이다. 그리하여 주인공은 스스로를 일컬어 망향초(望鄕草)라 부른다. 이런 이름의 식물은 세상에 없다. 혹자는 들국화(野菊)를 망향초로 부른다고도 하지만 이는 객지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초본류(草本類)로 향수를 강렬하게 유발시키는 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고모령은 언젠가는 기어코 넘어야만 될 높은 고개요 장벽이었던 것이다.

눈물 어린 인생 고개 몇 고개더냐
장명등이 깜빡이던 주막집에서
손바닥에 쓰인 하소 적어가면서
오늘밤도 불러본다 망향의 노래
-‘비 나리는 고모령’ 3절 가사

©이동순

필자의 장난스런 심사는 어느 날 기어이 고도계(高度計)를 들고 고모령 언덕에 올라 높이를 측정했는데, 해발 50미터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추풍령, 이화령, 대관령 등 한국의 높은 고개라면 적어도 500m는 넘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이 낮고 야트막한 언덕에 ‘영(嶺)’이란 과분한 글자를 붙인 것일까? 그것은 과학적으로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리하여 필자는 밤 깊도록 고모령의 의미와 상징성에 대하여 사색과 성찰을 계속했다. 오래지 않아 답이 풀렸다. 고모령은 바로 우리 민족이 험난했던 한국현대사의 전체 구간을 살아오면서 무수히 넘고 넘었던 아리랑고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방과 분단, 좌우익대립과 6·25전쟁, 보릿고개, 거듭된 독재정권의 발호, 베트남전쟁 참전, 서독의 광부와 간호사 파견, 중동근로자 파견, 민주화를 향한 숱한 시련의 과정들… 한 고개를 넘고 나면 또 다른 고개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 모든 곡절이 우리가 넘어왔던 아리랑고개였다. 바로 가사에 등장하는 숱한 ‘눈물 어린 인생 고개’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옛 노래 <비 내리는 고모령>에 등장하는 고모령은 바로 아리랑고개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장명등(長明燈)은 대문 밖이나 처마 끝에 달아 두고 밤에 불을 켜는 등을 가리킨다. 무덤 앞에 켜 놓는 등도 이런 이름으로 불렀지만 그것은 석등이었다. 고향을 떠나 오랜 세월을 타국에서 보낸 겨레들은 고향 집 대문이나 처마 밑에 흐릿하게 켜 놓았던 장명등을 잊지 못했으리라. 노래가사에서는 그 장명등이 주막집에 켜져 있는 광경으로 그리고 있다. 이런 술집이 있다면 얼마나 정취가 있고, 술맛도 한결 좋았을까를 상상해 본다. 가랑비는 부슬부슬 뿌리는데 주인공은 장명등이 켜져 있는 주막집 술청에 들어가 우선 술부터 시킨다. 그 주막에는 우선 맛있는 막걸리(탁배기)와 서민적인 안주가 언제가 준비되어 술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을 터이다. 술과 안주는 작은 소반에 정갈하게 차려져 나왔으리라. 그 소반을 들고 온 사람은 다름 아닌 주막집 안주인이거나 주막에서 여러 허드렛일을 보조하는 여인이었을 것이다.

시적화자는 고향으로 가는 길목의 주막집에서 한잔 술을 기울이는 상상을 한다. 주막집 여인과 마주 앉아 그 험한 세월을 살아온 참으로 말하기 힘든 가슴 속 사연을 조금씩 꺼내어 여인에게 들려준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는데, 여인은 살았던 곳이 어디냐고 자꾸 반복해서 묻는다. 주인공은 말로 하기가 차마 가슴이 아파서 여인의 손바닥에다 자신이 살았던 곳의 지명을 손가락으로 적어준다. 이 정도에서 이미 두 사람은 상당히 정분이 자라있는 상태였으리라.

광복이 되고도 우리 한국인들의 삶은 여전히 안정되지 못했으며 모처럼 찾아온 고향을 또 다시 떠나야만 하는 안타까운 가족이산의 현실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좌우익 대립과 갈등, 여순사건, 6·25전쟁, 남북분단, 4·19. 5·16, 베트남전쟁, 독일광부·간호사 파견, 중동근로자 현장파견 등으로 이별의 눈물은 마를 사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일까? 언젠가 ‘나눔의 집’에서 고단한 여생을 보내고 계신 정신대할머니들을 찾아가 가장 힘들었을 때 부르시던 노래가 무엇이었던가를 질문하는 방송사 관계자에게 어느 할머니는 이 ‘비 내리는 고모령’을 선뜻 부르셨다. 할머니들이 고생하던 일제말 이 노래는 물론 출현하지도 않았지만, 살아온 험한 세월을 돌이켜보노라니 할머니 가슴 속에서 이 노래의 가사가 저절로 눈물처럼 흥건히 고여 떠올랐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오피니언타임스=이동순]8·15 광복 직후 한국의 레코드 제작산업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일본인들이 독점하고 있던 레코드제작의 기술과 재료와 자본을 원활하게 공급할 여력을 전혀 갖추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해방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경과한 1947년 봄, 서울에서 고려, 럭키, 아세아 등의 레코드 제작사들이 설비와 환경을 갖추어 문을 열었다. ‘비 내리는 고모령’은 럭키레코드사에서 제작 발매되었다. 이미 ‘신라의 달밤’으로 한껏 인기가수로서의 상한가(上限價)를 치고 있던 가수 현인은 럭키레코드사 현관 간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그 흑백사진을 보면 럭키레코드주식회사의 간판이 가로로 길게 걸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이 회사명 ‘럭키’의 ‘럭’에서 ‘ㄹ’을 겹쳐서 복자음(復子音)으로 표기하고 있는 광경이 확인된다. 이것은 당시 영어를 좀 더 원음에 가깝게 발음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친절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   

  계명문화대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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