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미의 집에서 거리에서]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던 지난 4일 오전, 서울서 군산행 고속버스를 탔다. 탑승객은 4명뿐이었고, 월요일의 당일치기 나홀로 군산행은 날씨며 상황이 느긋하고 각별했다.

전북 군산의 100년 전 근대 가옥에서 작업하는 사진작가 민병헌 씨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일제강점기 건축물이 다수 남아있는 근대 문화유산의 도시 군산, 1998년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촬영지로 60,70년대 골목길의 정취가 여전하다는 군산행. 며칠 전 서울 공연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작가와 시간을 맞춘 방문길이었다.

민병헌의 사진 작품 WATERFALL. ©한미사진미술관 홈페이지 캡처

흔들린 듯 모호하고 은밀한 ‘회색 사진’으로 인지도 높은 민병헌

민병헌 씨는 필름카메라로 아날로그 방식의 전통 흑백사진을 추구하는 작가다. 촬영부터 인화 현상까지 작업의 전 과정을 조수의 도움없이 홀로 다 해낸다. 84년 첫 개인전 이후 흐릿하게 잡초, 안개, 나무, 설경, 폭포, 누드를 담아내온 민병헌 특유의 ‘회색 사진’은 미술시장에서 사진의 위상이 미약했던 1990년대부터 국내외에서 인지도가 높았다.

비 오거나 안개 낀 날, 자신의 눈에 들어온 대상을 포착한 그의 사진은 흔들린듯 모호하고 또 은밀하다. 선(禪)-정(靜)적 이미지에서 담백한 수묵화의 이미지를 읽어내기도 한다. 희뿌연 사진의 작가를 만나러 가는 날, 비까지 흩뿌리니 군산행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2시간 반만에 군산에 도착해 작가가 일러준 월명동으로 향했다. 약속시간에 앞서 일찌감치 도착해 주변을 둘러보니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속 ‘초원사진관’이 나타났다. 주차 단속 요원 역의 심은하가 타던 소형차, 변두리 사진관 주인 역인 한석규의 오토바이가 영화 장면처럼 놓여 있었다. 그밖에 ‘신흥동 일본식 가옥’을 비롯해, 손바느질 인형-가방 가게며 단층 혹은 2층 집들이 아련한 그때 그시절처럼 이어졌다.

군산 월명동 초원사진관 ©신세미

밤과 낮을 한 화면에 담은 듯한 기묘한 분위기의 군산집 이주… 작품도 달라져

‘사진작가의 집’은 단번에 찾을 수 있었다. 담 안쪽으로 짙은 녹색의 편백나무가 밤과 낮을 한 화면에 담아낸 초현실주의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빛의 제국’처럼 기묘한 분위기를 드러냈다. 벨 대신 핸드폰 통화 후 대문을 열어주는 작가를 따라 집으로 들어서니 키 큰 백합과 주황색 나리, 호랑가시나무 같은 화초들이 무성했다.

경기도 양평군 문호리에서 17년여 살던 작가가 군산과 연을 맺은 것은 2014년 1월 1일. 당시 나이 60, 첫 전시 30주년에 즈음해 자신의 사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던 그는 어쩌다 새해 첫날을 예정에도 없던 군산에 머물게 됐다. 그리곤 시간이 멈춘 듯 ‘어렸을 때를 생각케 하는’ 군산 구도심을 사나흘 맴돌다가 그 집을 발견했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목조가옥에 1970년대 빨간 벽돌집을 덧대 지은, 일본식도 양식도 아닌 묘한 건물이 그의 감성을 흔들었다. 마당에 제멋대로 웃자란 편백나무, 향나무, 후박나무, 삼나무 등이 무시무시하면서도 묘하게 멋져 보였단다. 300평 대지에 본채 별채 창고로 이뤄진 집은 십수년여 방치돼 마루나무가 썩고 살림살이들이 쓰레기처럼 쌓여 있었지만 그는 폐가를 자신의 집으로 만들었다.

별채에 기거하며 트럭으로 쓰레기를 걷어냈고, 목수와 집을 손보며 마당 시멘트를 벗겨내고 화초를 심었다. 그후 2년여 이제 ‘사진작가 민병헌의 군산집’은 서울서도 사진 건축분야는 물론 근사한 집을 소유한 재력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있는 명소다.

©픽사베이

나만의 감성과 시각이 우선… 자신을 느끼고 아는 것이 좋은 사진의 출발

군산으로 이주 후 ‘민병헌 사진’도 달라졌다. 비 오거나 흐린 날이 아니라 이즈음 맑은 날, 해 있는 오후2시쯤 촬영한다. 필름카메라로 찍어 직접 인화한 젤라틴 실버프린트는 마찬가지이나 크기가 가로 25cm 세로 20cm로 작아졌다. 부근 저수지에서 촬영한 새로운 ‘물가’ 시리즈는 편집 왜곡없이 대상을 그대로 담아내는 흑백사진이라는 점은 똑같다. 사진 속에 현실과 비현실이, 사진과 회화가 공존한다.

휴대폰을 이용해 언제 어디서든 카메라를 눌러대는 사진 촬영의 시대에, 좋은 사진의 노하우를 청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이제 어린이도 사진을 잘 찍는다. 사진이 너무 쉽고 뻔하게 생각되지만 그래서 끝까지 가기도 어렵다. 카메라를 들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만의 감성과 시각이 우선이다. 좋은 사진을 위해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 혼자 밥 먹고, 혼자 음악 듣고…. 모든 걸 혼자 하는 가운데 많은 것들이 느껴지고 또 보인다.”

카메라를 누르기 이전에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과정이야말로 좋은 사진의 원천이요 출발이라는 이야기다. 자신을 알아 가는 과정의 중요함, 그것이 어디 사진 촬영뿐이랴.[오피니언타임스=신세미]

 신세미

 전 문화일보 문화부장.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조선일보와 문화일보에서 기자로 35년여 미술 공연 여성 생활 등 문화 분야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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