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진의 민낯 칼럼]

나이들면서 잃어버리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입맛이 아닌가 싶다. 식사 때가 되어 뭐든 먹긴 먹어야 할 텐데 정작 먹고 싶은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가 많다. 모처럼 외식을 나가려 해도 꼭 찾아 먹고 싶은 음식이 없어서 궁리만 하다가 “그냥 찬밥에 물이나 말아 먹지”하고 눌러 앉은 적도 여러 번 있다.

어렸을 때 중국집에 가면 짜장면뿐만 아니라 짬뽕이나 군만두까지도 먹고 싶어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던 때나 닥치는 대로 먹었던 대학시절과는 상황이 전혀 달라진 것이니 나이를 먹긴 먹었나보다.

©픽사베이

캐나다 위니펙에서 있었던 회의를 마치고 워싱톤DC에 들렀을 때였다. 애넌데일의 한인타운에서 동창생들을 만나 마침 새로 개업했다는 평양냉면 집에 가보기로 했다.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라서 그다지 붐비지 않으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식당 앞은 손님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웬만하면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겠지만 호기심에 저녁 영업을 시작하는 6시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한시간여를 기다려 다른 손님들과 함께 줄을 지어 식당 안으로 들어갔지만 자리에 앉아 주문을 하는 데만 30분 이상이 걸렸고, 음식이 나오는 데 또 30분이 넘게 걸렸다.

결국 냉면 한 그릇을 먹기 위해 무려 두 시간 넘도록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손님들은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밖에서 번호표라도 받고 기다리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그 식당의 음식이 광고대로 평양냉면 전통의 맛을 지니고 있는지 어떤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팡이에 의지해서 또는 아들의 손을 잡고 식당으로 들어서는 노인들을 보고 있자니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유독 냉면을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이따금 맛있는 냉면집을 찾아냈다면서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곤 하셨다, 어린 내 입맛으로는 어느 집 냉면이나 다 비슷한 것 같았는데 아버지는 어디에도 옛날 고향에서 먹던 냉면 맛을 제대로 내지 못한다고 늘 안타까워 하셨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사냥을 다니는 친구들에게 꿩을 몇 마리씩 얻어 오기도 했는데, 그런 날은 예외 없이 잔치가 벌어졌다. 우리 식구들은 친척들을 위해 몇 시간씩 꿩만두를 빚었고, 집안에 가득 찬 녹두지짐 부치는 냄새가 분위기를 돋우곤 했다. 하지만 나는 꿩만두가 싫었다. 우선 축 늘어져 있는 꿩들의 불쌍한 모습이 눈에 어른거려 입맛을 잃게 했고, 뻘겋게 속이 비치는 만두피가 싫었으며, 나로서는 이상한 맛의 꿩만두보다는 쇠고기를 넣은 만두가 훨씬 맛있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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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별식을 드신 어른들은 으레 밥상 앞에 둘러 앉아 겨울이면 매를 데리고 사냥을 떠나던 고향에서의 추억들을 떠올리곤 했다. 매를 잡아 훈련시키는 요령, 먹이를 주지 않아 굶주린 매를 데리고 꿩사냥을 하던 즐거움, 사냥이 끝난 후에 얼음이 서걱거리는 동치미국물과 꿩고기로 낸 국물에 만 메밀국수 등에 관한 이야기를 지치지도 않고 밤늦도록 계속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어렸던 나에게는 유난스럽게 고향의 음식을 그리워하는 어른들이 그저 유별나게만 여겨졌다.

아버지가 1947년 6월, 월남하여 서울에 정착하고 6·25 전쟁을 지나 휴전 후에 출생한 나에게 누군가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잠시 머뭇거린다. 서울에서 살면서 서울을 고향이라고 부르기에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서울은 점점 고향의 이미지로 변해가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날이 흐리거나 비라도 뿌리는 날이면 어릴 때 다녔던 서울의 거리들과 그곳에서 맛있게 먹었던 음식들이 생각난다. 너무나 매워 머리털이 모조리 빠질 것 같은 무교동낙지, 연세대 앞 철다리 밑 신촌설렁탕의 만하탕도 생각나고, 기름통 앞에 서서 갓 튀겨낸 오징어 튀김을 후후 불며 집어 먹던 이대앞 튀김집, 손님이 식사를 채 끝내기도 전에 그 식탁 옆에 지켜 서서 차례를 기다리던 나이아가라 우동… 하다못해 청계천 초하급수로 만든 듯한 달걀아이스케키조차도 생각난다. 아직도 남아 있는 몇몇 집은 생각날 때 바로 가도 되겠지만, 그게 그리 쉽지 않으니 그 집들이 점점 그리워진다.

먹고 싶은 음식들이 점차로 없어져 간다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그것은 어쩌면 움켜쥐고 있던 치열한 생존의 줄을 조금씩 놓아 가고 있다는 의미인지도 몰라 깜짝 깜짝 놀란다. 추운 겨울에도 구파발로 의정부로 장충동으로… 어디가 됐든, 맛있는 냉면집을 찾아 나서던 아버지의 마음을 이젠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아마도 아버지는 맛있는 냉면이 아니라 되돌아갈 수 없는 고향과 젊은 시절의 자취를 찾아 다니셨던 것이다.[오피니언타임스=안희진]

*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 벽성군 동운면으로 지금은 해주시로 편입된 지역이다.

 안희진

 한국DPI 국제위원·상임이사

 UN ESCAP 사회복지전문위원

 장애인복지신문 발행인 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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