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환의 프리미엄 코리아]

요즘 들어 부쩍 우리 사회에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인상을 받는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보도되는 이런저런 사건들뿐만 아니라 길거리나 지하철에서 스쳐가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느낀다고 말하면 필자의 과민반응일까? 어쨌든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다보니 여러 분야에서 탐욕이 과잉 분출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동시에 비판의 화살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절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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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스런 사람 크게 늘어… ‘탐욕은 파멸’이라는 경고, 효력 다했나

예부터 고등종교에서는 예외 없이 탐욕을 죄악시해왔다. 가톨릭에서는 칠죄종(七罪宗)으로 탐욕, 교만, 사치, 질투, 탐식, 분노, 나태를 지적하며, 이 가운데 탐욕과 교만은 가장 큰 악덕을 다퉈왔다. 불교에서도 탐(貪)·진(瞋)·치(痴)를 삼독(三毒)으로 경계해왔으며, 그 밖에 모든 도덕적 종교에서도 탐욕을 대표적인 악덕으로 간주하고 있다. 탐욕은 궁극적으로 개인을 파멸시키고 사회적 통합을 저해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당연한 경고라 하겠다. 그렇지만 이제는 효력이 다한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발달하고, 특히 금융자본의 경제 권력이 강력해진 요즈음 탐욕은 종종 발전과 혁신을 주도하는 원동력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런 입장은 1987년에 개봉된 영화 ‘월스트리트(The Wall Street)’에서 악덕 금융자본가 고든 게코 역을 맡은 배우 마이클 더글러스가 역설한 “탐욕은 좋은 것이다(Greed is good)”라는 명대사(?)에 잘 표현되어 있다. 드러내지는 않지만 어느 사회나 이 말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아무런 도덕적 제재나 사회적 비난이 없다면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탐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넘쳐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탐욕이 과연 인간의 본성에 깊이 각인된 특성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논의에 앞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 탐욕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우선 어디까지는 단순한 욕심에 불과하고 어디부터는 탐욕이라 할 수 있는지 경계가 모호하다. 예컨대 세계 최고의 부자인 빌 게이츠가 수천만 달러 상당의 주택을 소유한 것은 탐욕에 해당하는가? 아니면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를 미국 나스닥에 상장해 수십조 원 대의 부자가 된 중국의 마윈이 얼마 전 뉴욕 시 외곽의 고급 주택가에 고가의 주택을 구입했다는데 그는 탐욕스러운 인간인가? 이런 식으로 질문하다보면 탐욕의 기준이 정말 모호해진다.

또한 탐욕의 대상에는 무엇이 포함되어야 하는 점도 모호하다. 대체로 탐욕은 재물을 대상으로 표출된다. 그렇지만 권력이나 명예 등도 탐욕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재물만이 대상이라 할 수도 없다.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욕망이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자 하는 집착도 탐욕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이같이 집착은 탐욕의 원인이자 결과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는 탐욕의 기준에 대해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 단편은 더 많은 땅을 소유하고자 하는 농부 바흠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넓고 좋은 땅을 갖기 위해 어떤 부족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찾아가 토지를 사고 싶다고 제안했다. 그 부족의 우두머리는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동이 틀 때부터 걷기 시작해 해가 지기 전에 출발점으로 돌아오면 농부가 표시한 모든 땅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단,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지 못하면 땅을 소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돈도 돌려받지 못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농부는 이를 수락하고 길을 떠난 후 중간에 비옥한 땅을 보자 더 소유하고픈 욕심에 계속 걷다가 결국 돌아올 때를 놓쳐 허겁지겁 출발점으로 돌아오지만 결국 과로로 숨지고 만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탐욕의 중요한 기준을 발견할 수 있다.

농부 바흠은 ‘조금만 더’라는 욕심 때문에 결국 한 평 남짓 무덤에 묻히게 된다. ©픽사베이

성정(性情)으로 본 탐욕의 기준은?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탐욕은 ‘부, 지위 및 권력에 대한 과도하거나 만족할 줄 모르는 갈망’이다. 이 정의에는 앞서 언급한 모호한 기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를테면 ‘과도하거나 만족할 줄 모르는’이라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인 개념이다. 또한 ‘부, 지위 및 권력’에 대한 갈망이라고 하지만 다른 것들도 탐욕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탐욕을 정의하는 것은 순환론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이 사유재산제도가 확립되고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이런 모호한 기준으로 탐욕을 매도(罵倒)한다면 사회적 공감을 얻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갈망을 ‘탐욕’으로 구분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준을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첫째,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노력한 것 이상을 갈구(渴求)하는 마음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사람은 자기의 내면에 ‘공정한 관찰자’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얼핏 들으면 모호한 얘기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웬만한 사람에게는 이런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겉으로는 자기가 옳다고 우기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틀렸음을 알고 있다고 본다. 단지, 체면이나 욕심 때문에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탐욕스러운 사람은 이런 공정한 관찰자를 완전히 배제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오직 매순간 자신의 이익만이 중요하므로 지대추구행위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둘째, 감각적 쾌락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이런 상태에 있으면 인간의 오감(五感)을 넘어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오감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선(善)이요, 그렇지 않은 것은 모두 악(惡)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감각적 쾌락만이 궁극적 실체이고 나머지는 모두 허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리주의는 개인의 쾌락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적지 않은 부작용을 초래했다고 본다.

셋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은 단지 수단일 뿐이라는 마음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탐욕으로 가득 찬 사람에게는 자신의 이익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아가 자기중심주의에 함몰되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탐욕은 이기심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를 야기한다. 탐욕가는 사회적으로 피해를 주더라도 자신의 이익을 우선할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서 공동선에 대한 의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전형적인 사례는 매국노 이완용 및 그 아류(亞流)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이상은 필자가 두서없이 ‘탐욕’이라는 성정(性情)의 기준을 제시해 본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모호한 기준을 가지고 마녀사냥 하듯이 타인을 비방하거나 매도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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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탐욕을 미덕으로 칭송하는 시대

이에 덧붙여 협동조합 이론의 대가인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교의 스테파노 자마니 교수의 저서 ‘인류 최악의 미덕, 탐욕’은 탐욕과 관련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 책에서 자마니 교수는 탐욕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천사를 다룬 후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오늘날 탐욕으로 대변되는 시대적 조류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인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먼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경제적 상황이나 종교적 입장 그리고 정치적 흐름에 따라 탐욕이 때로는 악덕으로, 때로는 미덕으로 간주되어 온 과정을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최악의 미덕’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을 쓴 것이다. 탐욕이 때로는 미덕으로 칭송되었으며 지금이 바로 그런 시기라고 말한다.

그는 쾌락이 곧 행복이라면 탐욕도 행복에 이르는 방법이 될 수 있지만, 이것은 공리주의가 가져온 커다란 폐해임을 강조한다. 필자도 행복을 쾌락으로 단순화시킨 것은 공리주의, 나아가 경제학의 치명적 오점이라고 생각한다. 행복은 그 이상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의미에서의 행복, 즉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을 추구하는 데 탐욕은 가장 큰 장애물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행복, 즉 상호성을 전제로 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으면서 상호 의존한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한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에서 행복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은 탐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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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과 나눔·상호성 실천해야 행복의 문 열려

우리 모두에게 잘 알려진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은 지금도 교훈적이다. 탐욕스러운 주인공 스크루지가 진정한 행복을 찾게 된 것은 이웃과 나누는 즐거움을 발견하게 된 이후다. 탐욕가는 무절제하게 끊임없이 축적하려는 사람이기에 나눔의 의미를 모른다. 그럼으로써 결국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행복의 문은 밖을 향해 열려 있어서 스스로 ‘자기 밖으로’ 걸어 나가지 않으면 그 문은 결국 도로 닫힐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탐욕가는 행복의 문으로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다.”

이웃과의 나눔을 통해 상호성을 실천함으로써 조금이라도 탐욕을 절제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우리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아질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절제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탐욕 10% 줄이기’ 캠페인을 제안한다. 이것을 탐욕의 부가세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단, 이 세금은 정부가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위해 우리 자신에게 자발적으로 부과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과 사회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세금이라 확신한다.[오피니언타임스=이영환]

 이영환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 이사

  미시경제학 등 다수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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