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문화로 만나는 세상]

10여년 후면 인천 영종도는 마카오가 된다. 인천국제공항 국제업무지역에 3개의 거대 카지노 복합리조트가 들어서니까. 물론 외국인 전용이다. 그 유혹의 휘황찬란한 불빛이 번쩍여도 우리 국민은 갈 수 없다.

혹시 모르겠다. 지금은 ‘출입금지’로 못 박고 있지만, 문을 열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있어 어느 미친 정부가 ‘제한적’이란 있으나마나한 꼬리표를 붙이고 ‘허용’으로 바꿀지도. 싱가포르처럼 말이다.

그게 아니라도, 대한민국에 ‘도박’할 곳은 널려있다. 강원도 정선에 가면 카지노가 있고, 가까운 곳에 경정과 경륜이 벌어지고, 스포츠 토토와 로또도 있다. 이들의 매출액만 1년에 10조원이 넘는다.‘합법’만 있나. 스포츠 불법도박에 인터넷, 해외 원정 도박에 프로스포츠 선수도, 연예인도, 화장품 졸부도 매달린다. 심지어 학생 선수들까지 불법 스포츠도박에 빠져들고 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추산에 따르면 2014년 기준으로 불법도박 규모는 106조원으로 우리나라 지난해 복지예산 115조원과 거의 맞먹는 수준이다. 도박 중독자도 7~9%로 최고 420만명(추산)으로 급증했다. 이미 2010년에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만 78조원에 이른다는 분석도 나와 있다.

ⓒ픽사베이

‘도박’을 경제로만 보면

그뿐인가. 권력과 지위를 이용한 불법도박도 횡행하고 있다. 사회적 책임이나 임무, 도덕과 양심을 팽개치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거액의 뇌물을 챙기는 인간들로 넘쳐난다. 높은 곳일수록 판돈도 크다. 가히 ‘도박공화국’이다.

정부는 도박(사행)산업의 중요한 이유로 ‘국가경제’와 ‘지역발전’을 이야기한다. 영종도 카지노 복합단지만 해도 수 십 조원의 외국자본이 들어오고, 그에 따른 고용효과 관관산업 등에 파급효과를 떠벌린다. 경륜과 경정 역시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고, 수익금 전액을 국민체육진흥기금, 문화예술진흥기금, 청소년육성기금 등 국민복지와 지역발전에 쓴다고 자랑한다.

이유는 또 있다. 국민경제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불법도박을 막는데도 일조를 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도박에 대한 욕구가 이렇게 큰 나라에서 과도하게 규제를 할 경우 불법도박만 기승을 부리게 만들고 ‘지하경제’만 키운다는 것이다. 게다가 선량한 국민들이 자칫 범죄자가 되는 일도 막고. 그야말로 ‘일석삼조’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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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득이 있다고 정당한가?

도박은, 특히 사다리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희망’으로 유혹한다. 결코 실현되지 않을 신기루 같은 희망이다. 도박판만큼 풍요로운 곳은 없다. 전광판에는 잭팟에 걸린 어마어마한 상금이 번쩍이고, 화투판 위에는 판돈이 뭉치로 올려있고, 룰렛게임에서 칩이 수북하다. 이 놀라운 풍요로운 눈요기.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한번 잘하면 그것이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만든다.

보스니아 출신 소설가 이보 안드리치는 장편소설 ‘드리나 강의 다리’에서 ‘불행은 다른 것이 아니라, 도저히 불가능하고 금지되어 있는 일이 갑자기 쉽고 해낼 만하게 되거나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바로 그 때인 것’ 이라고 했다. 그리고 일단 이것이 욕망에 단단히 뿌리를 박게 되면,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 그것을 얻으려는 사람에게는 미리 정해진 온갖 재앙이 뒤따르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 욕망이야말로 오락과 놀이의 한계선을 무너뜨린다. 도박에는 배려와 우정이 없다. 도박은 그 자체로도 사기이고, 사기를 부린다. 노름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 많을수록 가난한 사람 등쳐먹고 사는 사기꾼도 많은 법이라는 주장은 그래서 진실이다. 합법적 도박은 정부가 사기꾼을 자처하고, 사기꾼을 보호하는 것이다.

멕시코의 호세 호아킨 페르난데스 데 리사르디의 풍자소설 ‘페리키요 사르니엔토’는 이렇게 묻는다. ‘도박을 지지하고 열심히 비호하는 무리들이 과연 누구인가? 잘 생각해보라’고. 그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득이 있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말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떤 것이 정당한 것으로 판정되려면 이득이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정직한 것, 금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명만 살고, 999명은 죽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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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주인공이 바로 ‘나’일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노리고 도박을 한다. ‘페리키요 사르니엔토’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건 잘못이야. 그런 기대로 노름판에 끼는 놈들이 1,000명이라면 그 중 999명은 더 가난하게 되어 집으로 돌아간다. 노름이란 오늘은 열 개를 준다 해도, 내일이면 스무 개를 앗아가지.’

사람들은 ‘999명’과 ‘내일의 스무 개’를 보지 않으려 한다. 영화 ‘타짜’도 도박판에 몰려들어 몽땅 털리고 마는 수많은 들러리(단역들)에게는 관심 없다. 엄연한 ‘현실’이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대신 그 999명을 희생으로 돈을 챙기는 주인공 고니(조승우)의 기막힌 속임수와 짜릿한 승리에 집중한다. 그가 바로 ‘당신’ 이고, ‘당신의 희망’이라는 달콤한 환상을 심어준다.

때문에 아무리 손가락을 자르고, 인간적 배신감에 떨며 거액을 모두 불사르고, 가방의 돈을 모두 바람에 날려버리는 비판의 몸짓을 해도 도박영화는 도박만큼 반사회적이다. 아무리 나라가 난리를 쳐도 나만 도박 안 하면 되고, 영화는 영화로만 보면 된다. 맞는 말 같지만, 그것도 현실에 한 가닥 ‘희망’이라도 있는 나라, 정직하게 노력하고, 발버둥을 치면 조금이라도 올라갈 수 있는 나라에서의 얘기다. 그렇지 않은 세상에서는 ‘도박’뿐이니까.

 

 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전 한국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저서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14세 소년, 극장에 가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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