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진의 지구촌 뒤안길]

2차대전 후 일본 왕조의 역사에 대한 저술 ‘일본 국민의 황제’를 쓴 미 포틀랜드 주립대학의 케네스 루오프는 “아키히토(明仁) 일왕과 미치코(美智子) 왕비가 일본의 양심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이들은 일본의 양심과 관련, 가장 주목받는 인물들이다”라고 말했다. 일본에서 가장 큰 특권을 누리고 있는 일왕 부부는 일본에서 가장 특권이 없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데 자신들의 삶의 대부분을 쏟아부었다고 그는 지적했다. 일본 국가의 상징이라는 헌법 상 지위 때문만이 아니라 이처럼 국민들을 위해 헌신하는 일왕 부부의 모습 때문에 일본 국민들에게 아키히토 일왕의 인기는 절대적이다.

이는 안보 관련 법안과 국가기밀보호법 등 국민 대다수가 반대한 법안을 의회 내에서의 수적 우위만을 배경으로 강행 통과시킨 아베 신조(安倍晉三) 일본 총리가 곳곳에서 조롱을 받는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아베 총리는 지난달 치러진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중·참의원 모두에서 개헌 발의에 필요한 의원 수를 확보하는 등 정치적으로는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국민들에 대한 호소력에서는 아키히토 일왕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

지난 8일 아키히토 일본 국왕의 조기퇴위 의사를 담은 사전 녹화 대국민 메시지가 방송되고 있다. ©NHK 캡처

그런 아키히토 일왕이 지난 8일 죽기 전에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나루히토(德仁) 왕세자에게 일왕의 자리를 물려주고 퇴위하고 싶다고 일본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사전 녹화된 10여분 분량의 동영상을 통해서였다. 아키히토는 82살이라는 고령(그는 오는 12월23일 83번째 생일을 맞는다)과 건강 악화(그는 2003년 전립선암 수술을 받았고 2012년에는 협심증으로 관상동맥 우회수술을 받았었다) 때문에 국왕으로서의 의무를 다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우려를 표면적 이유로 내세웠다. 그의 호소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 85%에 가까운 일본 국민들이 아키히토 일왕의 퇴위 희망을 존중해 그가 물러날 수 있도록 일본 왕실 전범을 고치는 것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고다카 다이스케(34)라는 도쿄 회사원은 “우리는 일왕에 대해 존경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를 노예처럼 부려먹었다고 할 수 있다. 일왕은 국가의 상징이지만 한 개인으로서 그는 어떤 인권도 없다. 그의 인권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일본 언론 상당수가 아키히토 일왕의 퇴위 호소를 일본을 2차대전 전과 같은 군국주의 국가로 되돌리려는 아베 총리 정부의 움직임을 막기 위한 마지막 저항으로 규정했다. 아키히토의 생전 퇴위가 이뤄질 경우 새로 일왕의 자리에 오를 나루히토와 아베 총리 간에 긴 전쟁이 시작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일본 언론들은 지적했다.

아키히토는 이날 호소에서 ‘국가의 상징’이라는 표현을 6차례나 사용했다. 이에 대해 일본 언론들은 일왕이 신으로 추앙받으면서 한국과 중국 등에 대한 정복에 나서고 결국 2차대전으로까지 확전된 참화를 지휘했던 어두웠던 과거 역사와의 대비를 강조하려 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아베 총리는 평화헌법으로 불리는, 미국 주도로 마련된 전후 일본 헌법이 일본 국가와 국민을 모독하는 것이라며 전쟁 전과 같은 헌법 부활을 꾀하고 있다. 반면 아키히토 일왕과 나루히토 왕세자는 모두 평화주의와 평화헌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전쟁 중 일본이 저지른 전범 행위도 솔직히 인정하고 현 아베 정부의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누차 내놓아 왔다.

아키히토의 퇴위 호소가 과거 제국주의의 영광을 되살려보겠다는 아베 총리의 욕망에 제동을 걸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은 실제 퇴위가 이뤄지려면 일왕이 사망하기 전에는 스스로 물러날 수 없다는 현 헌법을 개정하지 않는 한 나루히토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베 정부는 ‘전쟁을 포기하고, 국가의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으며, 군대를 보유하지 않는다’고 명기하고 있는 평화헌법 9조를 폐지해 일본을 다시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되돌리는 새 헌법 마련에 모든 노력을 쏟고 있지만 일왕의 퇴위 호소에 대한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왕실 전범을 고치는 데 나서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며 그렇게 되면 아베 정부의 평화헌법 개정은 자연히 늦춰질 수밖에 없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14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전후 70주년 담화(아베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물론 아베 정부가 왕실 전범만 개정하고 안보관련 법안 등 다른 내용들은 자신들의 희망대로 계속 추진할 가능성도 남아 있다. 하지만 아키히토가 단순히 일왕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만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아베 총리는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정치에 개입할 수 없다는 헌법 상의 제약에서 자유로워지면 아키히토가 개헌 반대에 더 큰 목소리를 내놓을 가능성은 충분히 크다 할 수 있다.

아베 총리에 맞서는 것은 미치코 왕비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지난해 아베 총리가 자민당 총재 자격으로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합사된 A급 전범 14명을 애도하는 메시지를 발표하자 전쟁 중 일본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막중한 책임을 거론하며 아베에 대한 반박에 나섰다. 일본 왕실 전체가 아베 총리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아베 총리는 일본 정치를 이끄는 주류인 닛폰가이기(日本會議)이 고문을 맡고 있다. 닛폰가이기는 일왕을 숭배하는 신토(神道)를 바탕으로 한다. 다쿠보 다다에(田久保忠衛) 닛폰가이기 회장은 지난달 “일왕이 말하는 것은 모두 다 옳다”고 말했었다. 닛폰가이기가 아키히토 일왕의 유지되기를 희망하는 평화헌법 유지를 진심으로 지지한다면 아베 총리가 이에 거스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아키히토는 퇴위 호소에서 “전후의 일본이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는 평화와 민주주의”라고 강조했다. 이는 2010년 세계 11위이던 일본의 언론자유지수를 2012년 재집권 후 72위까지 급락시킨 아베 총리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아키히토 일왕의 생전 퇴위가 그의 희망대로 이뤄질 것인지 여부는 전후 일본의 국가 정체성과 일본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곡점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이를 둘러싼 아키히토 일왕과 아베 총리 간의 긴 전쟁은 이제 겨우 막을 올렸다고 할 수 있다.[오피니언타임스=유세진]

 유세진

 뉴시스 국제뉴스 담당 전문위원

 전 세계일보 해외논단 객원편집위원    

 전 서울신문 독일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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