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환의 프리미엄 코리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각종 보이스피싱이 난무하더니 지속적인 계몽으로 시민들의 경각심이 높아져서인지 요즘에는 상당히 줄어든 것 같다. 그런데 보이스피싱은 일반적인 의미의 피싱(phishing)의 한 가지 유형일 뿐이다. 피싱은 실로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기 행각에만 적용되는 용어도 아니다. 이 점을 검토하기 위해 우선 피싱의 의미부터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따르면 ‘피싱’이라는 단어는 월드 와이드 웹이 자리를 잡아가던 1996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피싱이란 ‘개인 정보 등을 빼내가기 위해 유명 기업을 사칭해 인터넷에서 벌이는 사기 행각 또는 기만적인 수법으로 개인 정보를 낚는(angling) 온라인 사기 행각’이다. 이런 의미에서 피싱은 ‘fishing’에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낚시꾼이 가짜 미끼를 이용해 물고기를 낚듯이 어수룩한 사람들을 낚아 부당이득을 얻으려는 행위가 바로 피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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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의 비대칭 속 ‘자유시장’이 피싱의 온상

그런데 피싱은 이런 사전적 의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피싱은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더 많은 분야에서 만연하고 있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자유시장에는 실로 다양한 형태의 피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자유시장 자체가 각종 피싱의 온상이라 할 수 있다. 경제이론에서 자유시장은 이상적인 시장의 전형(典型)으로 간주되어 왔으며,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다른 사람과 거래할 수 있는 시장은 개인의 후생(厚生), 나아가 사회의 후생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이상적인 경제 시스템으로 인정받아왔다. 이런 이유로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는 자유시장을 지향한다는 목표가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미의 자유시장은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의 세계에나 존재하는 것이지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자유시장이란 대칭정보, 완전한 경쟁 및 합리적 행동을 전제로 성립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유시장에 대한 찬사는 오로지 이런 조건 하에서만 성립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자유시장은 상대적으로 경제적 힘이 약한 사람이나 정보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늪이나 정글처럼 생존이 위협받을 수 있는 곳으로 전락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각종 피싱이 판을 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피싱은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자유시장의 어두운 면을 반영한다.

물론 자유시장이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는 기업가나 경영혁신을 달성하는 경영자에게는 막대한 보상을 해줌으로써 창조적 파괴를 통한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밝은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소비자의 유약한 심리나 정보적 취약성을 이용하지 않는 양심적인 기업가나 경영자는 보상해 주지 않는 어두운 면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유시장에서는 양심적인 경영자가 도덕성이 부족한 경영자에게 밀려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이것도 피싱의 일종에 해당한다. 자유시장은 적절한 제도와 법체계, 그리고 건전한 사회 규범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에만 부정적인 면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경제 시스템이다. 피싱을 최소화하는 자유시장,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경제 시스템이다.

금융사기 유형별 비중 추이 그래프.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6년 1분기 금융사기 피해액은 373억원이었고, 이 가운데 대출사기 피해액은 252억원으로 전체의 67.6%를 차지했다. ©포커스뉴스

금융권과 정치권에 피싱 만연

현실에서 피싱이 만연한 대표적인 분야로는 금융권과 정치권을 들 수 있다. 그 이유는 이 분야에서 인간의 비합리적인 행동과 정보의 비대칭이 가장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금융시장은 비이성적 행동이 판을 치는 시장이다. 이런 현상은 1980년대 이후 파생금융상품 거래가 활성화되고 다양한 금융상품의 증권화(securitization)가 대규모로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몇 해 전 키코(KIKO) 사태로 건실한 중견기업들이 대거 도산하는 황당한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금융상품에 무지한 개인 투자자들이 ELS라는 파생상품에 투자했다가 원금 대부분을 날리는 손실을 입기도 했다. 이 모두 금융권에서 발생한 피싱의 사례에 해당한다.

얼마 전 국내에서도 상영되었던 2008년 금융위기를 다룬 영화 ‘빅쇼트(The Big Short)’는 한산했던 투자은행들이 증권화를 고안해 금융거래에 적용하면서 일약 금융시장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된 상황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또한 피싱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기도 했다. 투자은행을 비롯해 금융기관들의 규모가 작았던 시절 피싱은 매우 드문 현상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규모가 커지고 막대한 이익을 올리면서부터 피싱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예컨대 세계 최대의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라든가 세계 최고의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 같은 금융기관도 규모가 작았던 시절에는 고객의 이익을 최우선했으며 공정한 신용평가를 목숨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다가 금융거래가 활성화되어 쉽게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들이 늘어나면서 이들 기관의 행태가 급격히 변했으며 상당 부분 피싱에 해당하는 행위들을 거침없이 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피싱을 통해서라도 손쉽게 이익을 추구하는 속물적인 기관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피싱은 상습적인 사기꾼들에게만 적용되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권자들은 정치인이 만든 ‘스토리’에 낚여 금융권 못지않게 피싱이 난무하는 분야로 정치권을 들 수 있다. 이 경우 피싱에 낚이는 사람들은 바로 유권자들이다. 민주주의를 실행하고 있는 나라에서 선거는 국민을 위해 주권을 행사하는 대리인을 선출하는 중요한 행사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대부분 선진국에서는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대부분의 유권자들이 민주주의의 이상과는 달리 정치인들이 만든 ‘스토리(story)’에 낚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권자들이 스토리에 약하다는 점을 이용한 전형적인 피싱의 사례이다.

그들은 유권자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그럴듯한 스토리를 만들어 대중매체를 통해 광고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이 시장의 소상인들이나 서민들을 찾아가 그들의 고충을 이해하는 듯 행동하는 것은 대부분 피싱에 해당한다. 다른 나라의 경우도 별반 차이가 없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미국의 대선 과정도 마찬가지다. 막말을 쏟아내는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일약 영향력 있는 대선 후보로 급부상한 과정은 피싱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밖에도 다양한 분야에 피싱이 만연해 있는데, 특히 정보적 우위를 바탕으로 하는 제약산업이나 중독성이 강한 제품을 판매하는 담배, 술, 식품 및 도박산업은 피싱이 난무하는 대표적인 분야다. 그밖에 자동차, 주택 및 신용카드 시장도 공공연하게 피싱이 이루어지고 있는 분야다. 이런 시장에서는 정보가 부족하고 스스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교묘하게 낚는 피싱이 성행하고 있다. 충동구매나 과소비는 피싱에 낚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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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허위 광고는 공공연한 피싱

이런 피싱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것이 다름 아니라 광고다. 심지어 광고의 목적은 어수룩한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낚는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광고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냉정히 생각한다면 쉽게 반박하기 어려울 것이다. 과장 광고나 허위 광고가 난무한다는 것은 공공연하게 피싱을 추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 전설적인 광고인들이 모두 피싱의 대가였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라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필자도 가끔 보는 미국 드라마 ‘MAD MEN’은 1960년대 미국 광고업계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 피싱에 효과적인 광고 카피를 고안하기 위해 고심하는 광고인들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경쟁이 심한 광고업계에서는 유능한 피싱맨이 아니면 생존하기 어렵다.

광고는 소비자들이 특정 상품을 좋아해 구매하도록 유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대부분 상품의 품질이나 성능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광고에서 주장하는 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이 세상은 그야말로 지상낙원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을 단연코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소비자는 광고의 이런 속성을 알면서도 광고가 전하는 스토리에 ‘낚여’ 특정 제품을 구매하는 행위를 반복하게 된다. 그렇다고 광고를 전면 금지할 수는 없으니 적절한 규제 수위를 정하는 것이 피싱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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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이 피싱에 쉽게 넘어가

이와 동일한 논리가 제약산업에도 적용된다.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약들이 광고에서와 같이 효과가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질병이나 통증으로 오래 고생하는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약들은 효능을 과장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제제가 미약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그 결과 몸과 마음이 아픈 환자들 대부분이 제약회사에 낚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피싱을 통해 쉽게 부당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존재하는 한 피싱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 또한 시장의 고유한 속성이기도 하다.

현실의 시장은 자유시장의 이상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 이 점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미국이나 독일과 같은 선진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곧 대부분의 시장에서는 자연스럽게 피싱이 득세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빈익빈 부익부의 논리는 피싱에도 적용된다. 가난한 사람들이 피싱에 더 쉽게 넘어가고 이로 인해 피해를 입는 경우가 더 흔하다. 따라서 피싱이 줄지 않는 한 개인의 후생을 극대화한다는 자유시장의 장점은 퇴색할 수밖에 없다. 빛과 그림자는 별개의 현상이 아니라 한 가지 현상의 두 측면이다. [오피니언타임스=이영환]

 이영환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 이사

  미시경제학 등 다수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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