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선의 너영나영]

아직 우리 법치의 수준이 낮기 때문일까. 1987년 체제 이후 정권 교체기에는 권력의 핵심인 대통령 친인척과 최측근에 대한 사정기관의 단죄가 어김없이 이어졌다. 이를테면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김홍업씨는 아버지의 임기 말에 각각 조세포탈과 이권 청탁 등 혐의로 구속됐다. 이들은 아버지가 퇴직한 뒤에도 다시 정치자금법 위반과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됐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형 이상득 전 의원은 동생 임기 말에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직 후 자녀와 친익척의 비리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청와대와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포커스뉴스

정권 후반기 권력형 비리 단죄는 어김없이 이어져

죄목은 조금씩 다르지만 크게 보면 모두 권력형 비리다. 요즘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의 비리 의혹 보도를 지켜보면 전직 대통령의 아들과 형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다만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근령씨의 사기 의혹 사건은 권력형 비리와는 거리가 있는 듯하다. 조금 허황하면서도 생계형 비리의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권력형 비리가 정권 교체기를 전후해 터지는 이유는 뭘까. 대표적인 공안검사였던 고 김원치 변호사는 2003년에 펴낸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이렇게 썼다. ‘정치권이 탄탄한 체제를 구축하고 있을 때 의혹 수사는 불가능하다. …정권 중추에 있는 거물을 체포하는 사태는… 기반이 취약해졌을 때에 한정된다.’

정권 초기에는 권력형 비리가 적을 뿐더러 수사하기도 어렵다. 칼을 들이대려다가 역공을 당해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만 떨어뜨릴 수 있다. 대통령 주변과 여당의 권력 핵심이 ‘점령군’으로서 인사권을 행사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내치고 자기 편을 사정기관의 장을 비롯해 주요 자리에 임명할 수 있다. 1988년 검찰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검찰총장 임기제가 도입된 뒤 22대 김기춘 총장부터 40대 김진태 총장에 이르기까지 19명 가운데 임기 2년을 마치고 퇴직한 사람은 7명뿐이다. 3명 중 2명 꼴로 당시 정권과의 갈등 또는 부하‧친인척 비리에 책임을 지는 형식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언론과 정권의 관계 역시 비슷하지 않나 싶다. 정권 초기에는 권력과 가깝거나 소통을 잘 할 수 있는 인사들을 편집국을 비롯해 사내 중요 자리에 앉히는 언론사들이 적지 않았다. 권력에 잘 보이려는 제스처로 해석되기도 했다. ‘허니문’ 기간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권력 핵심과 등지면 회사의 미래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도 깔려 있었을 것이다.

©포커스뉴스

검찰과 언론의 비리 단죄 의지는 ‘존재 이유’

검찰과 언론이 정권 후반기에 권력형 비리를 단죄하려 드는 것은 존재 이유 때문이다. 검찰이 권력형 비리를 못 본 체 방치하는 것은 스스로 사정기관임을 부정하는 것이다. 언론 역시 권력에 대한 감시견(watchdog) 역할을 하지 못하면 국민과 독자에게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미래의 권력에 길을 열어주고 새 권력과 친분을 쌓기 위한 의도도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경험으로 볼 때 현직 대통령을 넘어서야 새 정권의 창출이 가능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정권 창출의 공신 같은 역할을 하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5년 단임의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정권 후반기의 현직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민주국가, 특히 우리나라에서 정권 후반기에 권력형 비리에 대한 단죄는 거의 숙명적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까지는 권력형 비리 내사가 대개 ‘검찰발’이었던 데 비해 우 수석에 대한 의혹 제기는 ‘언론발’이라는 것이다. 검찰이 스스로 공직·사회기강 업무와 법률문제 등을 보좌하는 민정수석의 비리 여부를 살펴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비리가 없다면 모르되 만약 있다면 박근혜 정권의 검찰이 단죄하지 않으면 다음 정권의 검찰이 단죄할 것이다. 그때는 더 엄하게 처벌할 가능성이 높다.

대검 특별수사팀이 29일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의 가족회사인 정강을 압수수색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청와대는 ‘식물정부’ 우려해 맹비난, 언론사 간부의 비리 의혹도 명백히 밝혀야

청와대는 우 수석의 비리 의혹 제기에 대해 “집권 후반기 대통령과 정권을 흔들어 '식물정부'로 만들겠다는 의도”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밀리면 레임덕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우 수석의 비리 여부를 제대로 수사하려면 민정수석에서 물러나도록 해야 한다는 여론에도 오불관언(吾不關焉)이다. 사실상 수사 가이드 라인을 제시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청와대는 검찰에 우 수석에 대한 수사를 의뢰한 이석수 특별감찰관에서 대해서도 “특정 신문 기자에게 감찰정보를 누설했다”고 주장하며, ‘중대한 위법행위’, ‘국기를 흔드는 일’ 이라고 맹비난했다. 이에 대해선 본말이 전도된 주장이라는 의견이 적지 않다. 청와대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이는 새누리당의 김진태 의원은 “유력 언론사 논설주간이 2011년 9월 대우조선해양으로부터 전세기 이용 등 호화접대를 받았다”며 “아주 극단적인 모럴해저드의 전형이자 부패 세력의 부도덕한 행태”라고 주장했다. 특정 신문과 유력 언론사는 우 수석의 비리 의혹을 처음 제기한 뒤 여러 다른 의혹들을 잇따라 보도한 조선일보다. 당시 논설주간은 송희영 전 주필이다. 송 전 주필은 8월 29일 주필직을 사임했다.

검찰은 우 수석, 이 특별감찰관, 송희영 전 주필 사건 등 세 갈래로 수사를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김수남 검찰총장은 8월 23일 윤갑근 대구고검장을 우 수석과 이 감찰관 사건의 특별수사팀장으로 임명했다. 윤 팀장에 대해서는 “정권의 소방수”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그는 “살아있는 권력이 됐든, 누가 됐든 정도를 따라 갈 것”이라고 했다. 송 전 주필의 의혹은 두 사건과는 별개로 있는 그대로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 일각에선 청와대와 조선일보가 상대방에 대한 공격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에는 부담스러워서 여러 의혹 제기에도 불구하고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가능성도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지금까지 많은 의혹들이 제기됐고 국민도 알만큼 알았다. 그냥 묵과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과 이석수 특별감찰관 의혹을 동시 수사하고 있는 윤갑근 특별수사팀장이 24일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으로 출근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정치적 고려 없이 엄정한 수사로 신뢰 추락 막아야

지금까지 제기된 우 수석 관련 주요 의혹은 ∆우 수석 처가와 넥슨의 강남역 부동산 거래 ∆진경준 전 검사장 부실 검증 ∆처가의 경기도 화성 농지 보유의 농지법 위반 및 조세 포탈 ∆아들의 의경 보직과 관련한 직권 남용 ∆가족기업의 횡령이다. 다른 권력형 비리는 없었을까. 최근 한겨레신문의 한 칼럼은 지난해 초 우 민정수석이 취임한 뒤, 당시 검찰총장이 앞으로는 “전화를 (통한 수사 개입을) 삼가 달라”고 요청해 총장과 우 수석 사이가 내내 껄끄러웠다고 한다고 썼다.

1987년 체제 이후 레임덕을 막는 데 성공한 정권은 없다. 얼마나 늦출 수 있느냐의 문제였을 뿐이다. 레임덕을 막는다는 이유로 국정의 동맥경화를 초래해선 안 된다. 정권 후반기에는 협치가 중요하다. 오늘의 권력은 정권이 바뀌면 죽은 권력이 된다. 정권을 의식한 수사는 검찰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당연한 얘기이지만 윤갑근 수사팀은 정치적 고려 없이 엄정하게 수사해야 한다. 그래야 검찰이 살아남을 수 있다. 야당은 검찰의 수사가 미진하면 특검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했다.

봐주기 수사를 하더라도 국민이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미국 연방 대법원 스튜어트 판사는 1964년 음란물의 기준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보면 안다(I know it when I see it)”라고 표현했고 지금도 이 말은 회자된다. 우 수석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를 보면 제대로 수사한 것인지, 정권의 눈치를 본 것인지 국민이 알 것이다. 지금까지 제기된 의혹들은 복잡한 사안이 아니다. 지금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바닥이다. 국민은 물론 미래 정권의 검찰에 대한 신뢰는 우 수석에 대한 수사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본다. [오피니언타임스=황진선]

 황진선

 오피니언타임스 편집인

 가톨릭언론인협의회 회장

 전 서울신문 사회부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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