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문화도 나이와 세대별로 영역이 나누어지겠지만 그 가운데 대중가요만큼은 아무래도 청년기 특유의 전유물이 아닌가 합니다. 한 곡의 가요작품에 담겨 있는 가사의 내용이나 곡조의 표현은 대개 청년기의 경쾌함, 발랄함, 멋스러움 따위를 반영하는 것이 일반입니다. 어느 시대건 삶의 중심을 이루는 세대가 바로 청년들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대부분의 가요작품에는 젊은이의 사랑, 고뇌, 눈물, 고독, 방랑, 탄식, 고통 따위의 감정이 거울처럼 비쳐져 있습니다.

지금의 노년층은 흘러간 한 때 모두 청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청년들은 강물 같은 세월을 터벅터벅 걸어와서 계피학발(鷄皮鶴髮)의 늙은이가 되고 말았네요. 늙고 병든 몸은 눈먼 새도 찾지 않는다고 하지만 흘러간 옛 가요 속에서 우쭐거리며 활보하던 그 젊은이들은 모두 현재의 노옹(老翁)들이 아니겠습니까? 험난한 식민지시대와 광복 전후의 격동, 분단시대의 파도를 직접 몸으로 겪으며 살아온 분들입니다.

오케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어머님전 상백’ 레코드판. ©이동순

경로효친 사상이 담겨 있는 ‘어머님전 상백’

옛 가요를 잔잔히 듣다보면 우리 부모 세대,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이전의 선배 세대들이 어떤 고통과 악조건을 이겨내고 힘들게 살아왔던가를 고스란히 깨우쳐 알게 됩니다. 옛 가요가 오늘의 우리들에게 보내주는 아름다움은 이렇듯 고귀하고 소중한 역사적 체험으로 이어집니다. 옛 가요 속에는 드물게 당시 실버 세대들의 모습도 등장합니다. 거의 부모, 영감님, 중년, 행상노인 따위로 그려지고 있는데, 요즘 노래와는 달리 옛 가요에는 경로효친(敬老孝親) 사상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표현들이 많았습니다. 노래를 들어보면 그만큼 그 시절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1939년 12월 오케레코드사에서 발매된 가수 이화자(李花子, 1918~1950, 본명 이원재(李願載)의 노래 ‘어머님전 상백(上白)’(조명암 작사, 김영파 작곡, 오케 12212)은 지금 들어보아도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더워져옵니다.

어머님 어머님
기체후(氣體候) 일향만강(一向萬康) 하옵나이까
복모구구(伏慕區區) 무임하성지지(無任下誠之至)로소이다
하서(下書)를 받자오니 눈물이 앞을 가려
연분홍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고
하염없이 울었나이다

어머님 어머님
이 어린 딸자식은 어머님 전에
피눈물로 먹을 갈아 하소연합니다
전생에 무슨 죄로 어머님 이별하고
꽃피는 아침이나 새우는 저녁에
가슴 치며 탄식하나요

어머님 어머님
두 손을 마주 잡고 비옵나이다
남은 세상 길이길이 누리시옵소서
언제나 어머님의 무릎을 부여안고
가슴에 맺힌 한을 하소연하나요
돈수재배(頓首再拜)하옵나이다
-이화자의 노래 ‘어머님전 상백’ 전문

전체 3절로 구성된 이 노래는 한때 ‘어머님전 상서’란 제목으로 바뀌어 불리기도 했습니다. 상백(上白)이란 말은 윗사람께 아뢴다는 말뜻인데 어려운 한자말이라 그렇게 된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 노래의 가사를 음미하면서 우리는 ‘지독지정(舐犢之情)’이란 말에 담긴 살뜰한 의미를 새삼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어미 소가 제 낳은 송아지를 줄곧 핥으며 귀여워하는 것을 일컫는 말인데, 이 땅의 부모님들은 사랑하는 자녀를 만리타국으로 떠나보내며 과연 얼마나 여러 차례 가슴이 찢어졌겠습니까?

조선시대의 한문투 서간체로 쓰여

일제말 우리의 청년장정들은 지원병, 징용이란 이름으로 모두 일본 군대와 전쟁터로 끌려가고, 아리따운 처녀들 또한 정신대(挺身隊)란 이름으로 일본 군대에 끌려가서 반인륜적 악행을 강요받았습니다. 잘 살든 못 살든 가족이 한 지붕 밑에서 함께 살지 못하고 머나먼 타관객지로 끌려가서 강제 격리(隔離)된 비통한 정황에 처하고 말았으니, 이 노래가사에 담겨있는 고통과 탄식은 이러한 현실의 경과를 참으로 실감나게 증언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사의 전개과정에서 옛날 조선시대의 한문투 서간체(書簡體), 혹은 내간체(內簡體) 스타일을 그대로 느끼게 합니다.

‘기체후(氣體候) 일향만강(一向萬康) 하옵나이까?’ 이 대목을 먼저 풀어보고자 합니다. 서두의 ‘기체’는 기력과 신체의 뜻으로 유학적 품격과 체통을 중시하던 옛 서간체에서 자식이 웃어른께 안부를 여쭐 때 쓰는 말입니다. ‘일향’은 ‘언제나, 한결같이, 꾸준히’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일향만강’이란 대목은 옛 편지글에서 윗사람의 안부를 묻는 상투적 관용구로 흔히 쓰였는데 ‘늘 편안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체후’와 ‘일향만강’은 따로 분리되어서는 쓰이지 않습니다. 반드시 함께 붙어서 따라다녀야 합니다. 전체를 정리하자면 ‘몸 건강하고 편안하게 늘 잘 계시는지요?’ 라고 딸자식이 묻는 글귀입니다.

이어서 ‘복모구구(伏慕區區) 무임하성지지(無任下誠之至)로소이다’라 했는데 이 대목도 옛 편지글에서 흔히 쓰던 관용구였습니다. 내용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복모구구’는 엎드려 그리워하는 정이 그지없나이다’의 뜻입니다. ‘무임하성지지’는 ‘저의 보잘것없는 정성을 다하여 아뢰오니, (부모님을) 엎드려 그리워하는 마음이 그지없사옵나이다’, 더 짧게 간추리면 ‘몹시 그립습니다’라는 뜻이지요. 참 어려운 구절이지만 예전에는 뜻을 모르면서도 그저 그렇게 써야 되는 것으로 짐작하며 관습적으로 외워서 편지 첫 대목에 이렇게 썼습니다. ‘하서’는 보내주신 편지를 말합니다. 딸이 어머님께 쓰는 답신에서 우리는 조선시대의 전통적 내간체를 생생히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보더라도 조선시대는 확실히 강고한 형식주의 사회였던 듯합니다.

다시 이어지는 1절의 경과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친정어머니는 멀리 타관객지로 떠나간 딸에게 잘 있느냐며 안부를 묻고 부디 몸조심하라는 간곡한 당부의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딸은 어머님의 글월을 받고 정성어린 답장을 쓰다가 기어이 슬픔과 서러움에 북받쳐 치마로 얼굴을 덮고 흐느껴 웁니다. 그런데 딸이 입고 있는 치마가 연분홍색인 것을 보면 필시 어떤 곡절로 화류계(花柳界)에서 종사하는 여성이거나 순탄치 않은 삶의 굴곡 속으로 떨어져 현재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임을 짐작케 합니다. 작가는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조선여자정신대(朝鮮女子挺身隊)로 끌려간 이 땅의 억울한 여성들 처지를 생각하며 이 대목을 쓴 것인지도 모릅니다.

2절에서 딸자식은 그동안 가슴속에 켜켜이 쌓여있던 깊은 한을 탄식과 하소연으로 모조리 풀어내고 있습니다. 벼루에 물을 부어 먹을 갈아야 하는데 시적화자는 그것이 물이 아니라 피눈물이라고 표현합니다. 현재 모녀가 서로 이별 상태로 나뉘어 상봉하지 못하는 것이 마치 전생에 지은 자신의 죄값이라고 혼잣말로 탄식하기도 하네요. 이 대목에선 한국인의 상투적 운명관을 그대로 보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체념은 결코 하지 않습니다. 어머님을 다시 뵐 그날이 반드시 도래할 것이라고 시적화자는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꽃 피는 아침이나 새우는 저녁’은 ‘화조월석(花朝月夕)’의 다른 표현이니, 음력 2월과 8월의 보름밤을 가리키는 말로 가장 아름다운 계절을 뜻하는 구절입니다.

3절에서 딸자식은 앞서 결코 체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의를 속으로 다지기도 했지만 가혹한 현실은 어머니와 살아서 다시 만나는 것을 쉽게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으로 이어져 슬픈 탄식과 좌절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딸자식은 어머님께서 설령 자신을 만나지 못하게 될지라도 여생(餘生)을 길이길이 잘 누리시라는 간절하고도 안타까운 부탁을 어머님께 애끓는 마음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비록 표현은 겉으로 그렇게 하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어머님을 다시 만나 뵙는 그날이 반드시 다가올 것이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상봉의 그날이 오면 어머님께 딸자식은 자신이 겪어온 차마 말하기 힘든 맺힌 말들을 새벽닭이 울 때까지 남김없이 후련하게 털어놓고야 말 것이라는 다부진 상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딸자식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마치 앞에 어머님이 앉아 계시기라도 한 것처럼 두 손등을 공손히 이마에 받쳐 올리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구부려 큰절을 두 번 드립니다. 돈수재배(頓首再拜)의 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대목은 옛 편지글의 첫머리나 끝에서 ‘경의를 표함’이라는 뜻으로 쓰던 관용구이지만 이 가요시작품에서는 특별한 의미의 함축으로 두툼하게 쓰이고 있네요.

가수는 가창력 뛰어난 기생 출신 이화자

작곡가 김영파는 김용환의 또 다른 예명입니다. 그가 폴리돌레코드사에서 책임자로 일할 때 한 지인이 경기도 부평의 어느 허름한 술집에서 목청이 기막히고 가창력이 뛰어난 작부가 있다고 제보를 했습니다. 재능 있는 가수의 발굴이 급했던 김용환은 직접 그 술집을 찾아서 술손님으로 위장하고 비 오는 밤 술집에서 작부의 노래를 듣고 또 들었습니다. 얼마나 솜씨가 뛰어난지 평가의 냉철함마저 잃어버리게 할 정도였지요. 마침내 김용환은 그 작부를 발탁해서 서울로 데리고 옵니다. 그 작부가 바로 가수 이화자입니다. ‘꼴망태 목동’ ‘화류춘몽’ ‘님전 화풀이’ ‘초립동’ ‘목단강 편지’ 등의 노래로 일제말 식민지 백성들의 한많은 가슴을 쓰다듬고 위로해준 귀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 ‘어머님전 상백’은 제목 다음에 ‘자서곡(自敍曲)’이란 표시가 밝혀져 있을 정도로 기생출신 가수 이화자 자신의 기구한 삶을 다룬 것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이 가요작품이 발표되었던 1939년 일제말 시대현실의 구체적 정황과 삶의 보편성을 너무도 잘 담아내고 있는 듯합니다. 일제에 의한 한국여성의 강제동원이 시작된 것은 비록 1943년부터이지만 이후 저 멀리 남양군도와 중국 등지로 정신대란 이름으로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慰安婦)’ 노릇을 강요받았던 조선여성들이 삶의 가파른 언덕길에서 이 노래를 피눈물로 부르고 또 불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새삼 가슴이 저미어옵니다. 이제 그 처녀들은 계피학발의 할머니가 되어 마지막 여생을 간고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한 맺힌 가슴을 풀지 못한 채 거의 다 돌아가시고 이제 불과 몇 분 남아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분들의 한을 풀기 위해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일제말 삶과 이별의 아픔 담아…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은 진행형

최근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 12명이 한국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고 합니다. 위안부피해자들은 정부가 2015년 12월28일, 일본과 맺은 위안부 한일합의가 2011년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어긋나는 행위로 피해자들에게 많은 정신적 물질적 손해를 끼쳤으므로 생존자당 각 1억 원의 손해배상을 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2011년 헌재는 정부가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정부에 손해배상 책임을 묻지 않은 것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므로 위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노력을 제대로 기울이지 않은 그 '부작위'가 바로 위헌이라는 것입니다. 이번 소송의 원고인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이 법적 책임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 스스로 '최종적·불가역적 해결' 등의 참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불가해(不可解)한 표현까지 써가며 지난해 말 일본과 합의한 것이 헌재가 지적한 '위헌적인 부작위'의 영속화를 선언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체 무엇이 급해서 정부는 이렇게 서둘러대는 것인지요?

옛 어른들은 아무리 다급해도 일의 선후를 잘 분별해서 냉철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일렀거늘 어떻게 정부는 그토록 중차대한 일을 이렇게도 경솔하게 처리해버림으로써 위안부피해자들의 가슴에 또다시 새로운 못 하나를 더 박아대고 있단 말입니까?

이런 점에서 1939년에 만들어진 옛 가요 ‘어머님전 상백’이 머금고 있는 민족의 비애와 고통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은 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우리 앞에 방치되어 있는가 봅니다.[오피니언타임스=이동순]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   

  계명문화대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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