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진의 민낯칼럼]

딸 아이에게 예쁜 드레스를 입혀 손목잡고 나들이 다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고 있으니 감개무량함을 넘어 기가 막힐 정도다. 딸은 어릴 때부터 비교적 옷도 잘 맞춰 입었고, 나름대로 패션 감각도 있었던 데다가 이제는 패션 회사까지 다니니 그런대로 감각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개는 드레시하거나 패셔너블한 옷을 입는 편이지만, 가끔가다 오버사이즈(oversize)의 ‘아버지 패션’도 즐기는데, 오래 전 중학생 때 하던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하다.

지난해 9월 미국 뉴욕 패션쇼에서 모델이 헐렁한 옷을 입고 워킹하고 있다.©포커스뉴스

친구들과 만나서 집안 얘기들을 나누다 보면 이런 불평을 꽤 많이 털어놓는다. 인기 미드였던 빌코스비(Bill Cosby) 쇼에서도 아빠가 딸들 방으로 가서 자기 옷가지를 찾아오는 장면이 자주 나왔었다. 딸 셋을 가진 흑인 기자 한 사람은 티셔츠 10벌과 운동 양말 몇 켤레가 사온 지 1주일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헐렁헐렁하게 커다란 사이즈의 옷을 입는 것은 1970년대 초 영화 애니 홀(Annie Hall)에서부터 크게 유행했다. 여성들의 남장 유혹과 남성 흉내는 심리사회학자들의 좋은 연구 대상이기도 했겠지만, 그 당시 홍익대 앞에서는 아빠의 큰 와이셔츠를 입고 다니는 여대생들이 많이 눈에 띄기도 했다.

당시 미국 패션계에서는 오버사이즈 유행을 일본의 영향으로 보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1970년 대부터 서서히 두각을 나타낸 일본 디자이너들의 기모노 철학인지 아니면 남성숭배 습관인지 모르지만 그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야마모토, 이세 미야기, 가와구바 그리고 콤데 갸르쏭 등 모든 패션이 리바이벌 붐과 연결된다는 분석이었다.

예전 미국 TV광고에서도 애인이 없는 동안 남자 셔츠를 입은 여자와 아빠가 없는 동안 큰 셔츠를 좋아라 입는 여자아이들을 등장시켰었다. 남자를 대상으로 하는 광고인지 아닌지 모를 지경이었지만, 하여간 나로서는 웃음 나오는 광고였다.

©픽사베이

이 세상에 논리로 설명이 안 되는 것이 틴에이저의 유행이다. 딸이 중학생이던 때, “아빠 중학생일 때는 무슨 옷이 유행이었냐”는 물음에 “유행? 유행은 모르겠고, 일본 군국주의식 목을 조여 매는 검은 교복을 입고 다녔다”고 말하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옛날 학생시절 사진을 보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국가나 개인이나 너무나 가난하고 어려웠다. 그럼에도 바지폭을 늘였다 줄였다 하면서, 미군용 ‘스모르 바지’나 야전 점퍼를 염색해서 입거나 모자를 찢기도 했다. 후크는 물론 단추도 두어개쯤 풀어 제치며 멋부리던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그 같은 복장불량 단속이 마치 학교를 살리고 국가와 민족을 구하는 독립운동이나 미덕인 양 착각한 훈육 선생이나 유치찬란한 ‘경찰멘탈리티’를 가진 규율반 친구들도 있었다. 또 그 꼴에 멋을 부리면 얼마나 부린다고 교복의 칼라를 요리조리 바꿔보던 여학생들도 많았다. 지금은 중늙은이가 되었을 이들이 그런 과거를 떠올리면 얼마나 우스울까? 아마도 아빠 스웨터를 접어 입고 셔츠는 밖으로 내 놓고 낡은 아빠 재킷을 입고 학교 가는 딸아이도 세월이 흐르면 오늘을 회상하면서 재미있어 할 때도 오겠지.

올해로 남성 예복인 턱시도(tuxedo)가 탄생한 지 126년이 됐다고 한다. 126년 전 뉴욕주 북단의 백만장자 마을에서 무도회에 나간 한 백만장자의 장난꾸러기 아들이 어른들을 놀리기 위해 옷을 잘라 입은 것이 턱시도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것을 오늘날에는 결혼식은 물론 백악관의 대통령 파티에까지 너도 나도 입고 있으니 얼마나 웃기는 얘긴지 모르겠다.

워싱톤DC의 중심가 듀폰서클 근처, 유명 정치인들이 다니는 고급 레스토랑에 초대된 적이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다듬지도 못하고 청바지와 빨간 티셔츠를 입고 갔는데, 나를 보고 ‘서프라이즈’ 한 벨보이는 ‘드레스 코드에 맞지 않으니 입장할 수 없다. 돌아가 달라’며 정중하게 돌려 세웠다. 일순 당황해서 전전긍긍하자, 벨보이는 건너편의 턱시도 대여점을 가리키며 윙크를 했다. 턱시도 상하의와 미역줄기 같은 블라우스와 보타이(bow tie)에 구두까지 빌리려 하니, 바지와 구두는 안 빌려도 된다고 했다. 값이 비싸기도 하거니와 어차피 탁자 때문에 보이지도 않을 하의에 구두까지 바꿔 입고 신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그러고 보니 레스토랑에는 나와 같이 청바지나 반바지를 입은 채 대여용 턱시도를 입은 우스꽝스러운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지난해 9월26일 서울 경복궁에서 한복을 입은 관람객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버락 오바마가 백악관의 드레스 코드(dress code)를 폐지한 덕분에 백악관 직원들이 자유복장으로 출근하게 됐다는 보도가 나올 즈음, 한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신라호텔 뷔페 식당 입장을 거절당했던 한복 연구가에게 한국 최고 거부의 딸인 사장이 직접 사과를 했다는 보도를 접하고는 또다시 픽 웃음이 일었다. 뻔질나게 음식을 덜어 나르는 뷔페식당에서 한복이 불편하고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전봇대로 이를 쑤시든 말든 자유로운 세상에서 ‘韓服’을 입고 한국식당에 간 한국 사람을 드레스 코드 운운하며 쫓아내다니? 만약 유명 외국인이 한복을 입고 제 식당에 왔더라면 홍보실 직원을 동원하고 보도자료까지 뿌렸을 위인들이 말이다.

21세기, 자유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일개 식당 따위가 돼먹지 않은 복장검사를 하면서 웬 드레스 코드 타령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설날이니 추석이니 명절 때가 돼도 한복 입은 사람이 드물어진 세태를 생각하다 써봤다.[오피니언타임스=안희진]

 안희진

 한국DPI 국제위원·상임이사

 UN ESCAP 사회복지전문위원

 장애인복지신문 발행인 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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