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문화로 만나는 세상]

과격파 운동권 출신인 이치로. 대담하고, 제멋대로이고, 누구도 겁내지 않는 40대 중년이다. 국가와 사회, 모든 체제와 제도를 부정한다. 아들에게 다니기 싫으면 학교도 그만두라 하고, 세금도 일절 내지 않는다.

임순례 감독이 한국으로 무대를 바꿔 영화로 만든 일본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남쪽으로 튀어!>의 주인공이다. 그는 국민연금 납부를 독촉하러 방문한 공무원을 ‘구청에서 온 장사꾼’ 취급하면서 이렇게 소리친다. “체제에 빌붙어 사는 개 따위와 말 섞을 마음은 없어. 나는 관청이 벌레보다 싫어. 국민세금의 떡고물로 연명하겠다는 그 근성이 영 맘에 안 들어. 저런 인간들은 착취자와 가장 악질적인 한편이야.”

이치로는 반정부, 반체제 인사는 아니다. 한때 과격파 운동권이었지만 그들의 탐욕과 타락, 억압에 환멸을 느끼고 돌아섰다. 그냥 지금의 일본, 아니 국가 자체가 싫다는 것이다. 연금은 국민의 의무라는 공무원의 말에 그는 발끈하면서 “그럼 나는 국민 관두겠다”고 선언한다. 애초 원했던 일도 아니었으니까. “저희들 맘대로 국민으로 만들어 놓고 이래저래 세금을 뜯어간다니까. 그러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피지배계층이란 얘기야? 정말 웃기고 있어”

영화 ‘남쪽으로 튀어’ 스틸컷 ©네이버 영화

이 땅에서 당신이 튈 곳은 없다

그는 그것을 피해 해외가 아닌 저 남쪽, 사람이 살지 않을 것 같은 작은 섬으로 튀었다. 그곳에는 전기도 없고, 수도도 없고, 물론 그가 그렇게 싫어하는 공무원도, 세금도 없다. 상상과 허구의 소설이고, 소설로도 지나친 비약이고 과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치로가 원하는 세상은 없었다. 섬이 많기로 유명한 일본에서조차.

현대사회에서 국가란 울타리와 사회질서와 제도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곳은 어디에도 없다. 난 오늘부터 국민 안 하겠다고 그렇게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금내기 싫어, 제도에 길들여지기 싫어 ‘가지지도 말고 배우지도 말라’고 하지만, 그럴수록 자신만 더 비참해질 뿐이다. 아무리 먼 남쪽으로 튀어, 손수 농사짓고, 고기 잡아 먹고, 우물을 파서 원시인처럼 자급자족을 한다 해도 그곳에도 공무원(경찰)은 찾아오고, 세금이 쫓아온다.

<남쪽으로 튀어>가 원하는 것은 이탈과 전복의 멋진 성공이 아니다. 이 소설도 실패를 알고 있다. 다만 이치로의 어설프고 무모한 도전과 그 과정에서의 해프닝을 통해 국민을 위하고 공동체적 삶을 가꾼다는 이름으로 인간을 옥죄는 국가와 법과 제도, 그것을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들의 불합리와 탐욕, 이기주의와 비인간성, 그로인해 희망을 잃고 있는 세상을 통렬하게 풍자하려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도 마음만이라도 ‘남쪽으로 튀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튀어봤자 그들이 자조적으로 이름붙인 ‘헬조선’을 벗어날 수 없기에 해외로 나가거나 이민을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숫자는 얼마나 될까. 얼마 전 한 온라인 취업포탈(사람인)의 조사에 의하면 상상을 초월한다.

한국을 떠나는 사람들 ©픽사베이

그러면, 외국으로 튀어야지

조사대상인 성인남녀 1655명 중 무려 78.6%가 ‘갈 수만 있다면 가고 싶다’고 답했다. 과장하면 국민 10명 중 8명이다. 남녀노소가 없다. 30대(82.1%)가 가장 많았지만 20대(80%), 40대(72.4%)도 그에 못지않다. 50대 이상도 59%이다. 마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민을 생각하는 사람의 절반 가까이(47.9%)가 어학공부, 해외취업, 자금마련 등 이민을 위해 무언가 준비 중이다. 비용 마련을 위해 계를 만들고, 시간 내서 기술을 배우는 사람들도 있다.

무엇이 그렇게 싫어서 그들은 대한민국을 떠나려는 걸까. 흙수저와 금수저로 갈라져버린 양극화와 장벽이 싫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현실이 싫고, 경쟁만 부추기는 사회가 싫고, 노후대비가 안 되는 것이 싫고, 학벌사회가 싫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에 쫓기는 것보다 삶의 여유가 있는 곳, 일하기 좋은 곳, 소득 불평등이 덜한 곳, 노후 불안감이 없는 곳인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로 가고 싶어 한다. 동남아 국가의 청년들과 중국의 조선족, 심지어 이제는 북한 고위층에게까지 ‘희망의 땅’인 대한민국을 떠나겠단다.

장강명의 소설은 ‘한국이 싫어서’라고 했다. 싫어서라니? 싫다고 버릴 수 있는 것이 조국인가. 부모형제까지 팽개치고 낯선 언어와 문화와 삶을 시작하겠다고? 그럼, 얼마든지 그렇게 하겠단다. 국가는 운명이 아니라, 얼마든지 자의로 선택 가능한 것이며, 지금의 새로운 선택이 당당하다는 바탕에는 그렇게 우리가 소중히 하고 집착했던 같은 민족의 대한민국이 어쩌면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국가보다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지 모른다.

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 ©네이버 책

그게 뭐 그렇게 잘못됐어?

소설 <한국이 싫어서>에서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호주로 떠난 20대 후반의 여성 계냐는 우리에게 이렇게 반문한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 (그러니) 무턱대고 욕하진 말아줘. 내가 태어난 나라라도 싫어할 수 있는 거잖아. 그게 뭐 그렇게 잘못됐어?”

그렇다고 그녀가 원하는 삶은 거창한가. 아니다. ‘집이 안 커도 되고, 명품 백이니 뭐니 그런 건 하나도 필요 없다’고 했다. ‘당당하게 살고 싶어. 물건 팔면서, 아니면 손님 대하면서 얼마든지 고개를 숙일 수 있지.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내 자존심이랄까 존엄성이랄까 그런 것까지 팔고 싶지 않다’고 했다. 문학평론가 정은경은 이를 ‘낭만적 실존 방식’이라고 했다. 그녀의 이민은 그 낭만적 동경과 세속적 계산이 협상하여 만든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복지와 평등의 나라, 헬이 아닌 천국이라고 해도 차별이 있고, 불안이 있고, 세금이 있다. 나라만 다를 뿐, 역시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하면서 살아야 한다. 어쩌면 이방인으로 더 차별받으면서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이민을 선택한 계나는 “난 한국에서도 국외자였어… 나라가 나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지켜줬다고 하는데. 나도 법 지키고, 교육받고, 세금 내고 할 건 다 했어. 내 고국은 자기 자신을 사랑했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를. 그래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줄 구성원을 아꼈지. 김연아라든가, 삼성전자라든가. 그리고 못난 사람들한테는 주로 ‘나라망신’이라는 딱지를 붙여줬어.”

<한국이 싫어서>는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다. 누구는 지나친 자기비하와 비관, 불신과 증오라고 하겠지만, 지금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계나가 “가까이에서 보면 정글이고, 멀리서 보면 축사”라고 한 말이 ‘헬조선’보다 더 우울하고 끔찍하다. 우리 모두가 짐승이나 가축이 아니며 정글이나 축사에서 살 수는 없으니까.[오피니언타임스=이대현]

 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전 한국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저서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14세 소년, 극장에 가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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