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선의 너영나영]

대통령 선거 바로 전 해의 추석 연휴는 대선의 출발선이다. 대선 주자들의 목소리와 행동 반경은 추석 연휴를 기점으로 커지기 시작한다. 이번에도 언론은 대선 주자들의 추석 민심 탐방을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13일 청와대에서 조윤선, 김재수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이들은 인사청문회에서 각종 의혹이 드러나 국회가 부적격 보고서를 채택했지만 대통령은 임명을 강행했다. ©청와대

잇따르는 지도층의 비리… 나라 망치고 있다는 탄식 나와

대선 주자들은 민심을 탐방하며 그 흐름을 꿰뚫는 핵심 메시지, 곧 시대정신을 선점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다. 지금 그들이 한결같이 내세우는 메시지는 격차 해소, 양극화 해소, 상생과 공존 등이다. 크게 보면 경제 민주화의 다른 표현이다. 북한 김정은의 미사일 발사와 핵 실험 도발에 따른 민심의 불안을 수습하고 남북 관계의 새 비전을 제시하는 것도 비켜갈 수 없는 중요 과제다. 한데 두 과제 외에 최근 1~2년 새 떠오른 또 다른 시대적 과제가 있다. 바로 공공 부문의 도덕성 회복이다. 국회의원을 포함한 정치인, 장·차관 등 고위 관료, 판사와 검사와 변호사 등 고위 법조인의 비리는 용인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여기저기서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탄식이 나온다.

깨끗한 사람이 고위 공직에 임명돼야 한다는 취지로 도입한 국회 인사청문회는 무용지물이 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8월 24일 음주운전 사고 전력을 은폐했던 이철성 경찰청장의 임명을 강행한 데 이어 9월 4일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과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임명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 차 중국 항저우에 머물며 전자결재했다. 김 장관은 부동산 구매 자금과 전세 거주 특혜 의혹, 노모의 차상위 계층 등록으로, 조 장관은 재산신고 누락, 부동산 투기 의혹, 1년에 5억원을 쓴 호화 소비, 딸의 연예기획사 특혜 채용 의혹 등으로 물의를 빚었다. 야당 의원들이 부적격 보고서를 채택했지만 박 대통령은 무시했다. 이들의 임명을 미룰 경우 임기말 국정을 이끌어가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민의 가슴에는 화가 누적됐을 것이다. 그런 비리 의혹이 있더라도 장관이 되는 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부하 직원의 본보기가 되더라도 리더십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런 장관과 경찰청장이 과연 거대 부처와 청을 제대로 이끌어 갈 수 있을까. 최근에는 박 대통령의 퇴임 후 활동을 위해 미르 재단과 K스포츠 재단이 설립됐다는 의혹이 불거져 파문이 일고 있다. 기업들이 두 재단에 760억원을 출연하는 과정에 청와대가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일파만파를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경제 분야 대정부질문에 참석해 황교안 국무총리에게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의혹을 질의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사회 지도층 인사는 신분에 상응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진다는 뜻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회자됐다. 영국의 고위층 자제가 다니던 이튼칼리지 출신 중 2000여 명이 제1,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다는 예가 소개되기도 했다. 한데 요즘엔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표현이 사라지다시피한 것이 아닌가 싶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지도층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데다 국민 역시 그것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홍만표·최유정 변호사, 진경준 전 검사장 사건에 이어 김수천 부장판사와 김형준 부장검사 사건을 보면 오히려 비리를 저지르고 갑질을 일삼는 사람이 지도층에 오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가 ‘헬조선’이라는 것은 여러 보고서와 통계에서 기정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최근 국회입법조사처가 세계 상위 소득 데이터베이스(The World Top Income Database, WTID)와 국제통화기금(IMF) 자료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2012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상위 10%의 소득집중도는 44.9%로 전 세계에서 미국의 47.8%에 이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1995~2012년에 미국은 소득집중도가 7.3%포인트 높아진 데 비해 우리나라는 15.7%포인트나 높아졌다고 한다. 이미 양극화가 세계에서 가장 심한 나라가 됐거나 곧 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부익부 빈익빈과 빈부의 대물림과 고착이 점점 심화하는 양극화 사회의 국민은 좌절에 빠질 수밖에 없다.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젊은이들은 기성세대들의 ‘노오력’ 타령에 분노한다. ‘헬조선’,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탈조선’이라는 표현을 한때의 유행어쯤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픽사베이

우리 사회 분열의 가장 큰 요인은 불의한 부(富)의 축적을 방치하는 것

헬조선에 들어선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는 가장 큰 요인은 지도층 인사들의 불의한 부(富)의 축적을 방치하는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장차관직 등에 임명된 고위 공무원 가운데 과연 몇 명이나 정당하게 부를 축적했는지 의문이다. 지도층 자녀들의 특혜 채용 의혹도 잇따르고 있다. 더욱이 불의하게 부를 축적하는 거악들을 처벌해야 할 법조계 인사들이 불의하게 부를 축적하는 데 앞장선 것으로 드러났으니 국민의 좌절감은 더 클 수밖에 없다.

19대 대선의 시대정신은 경제 민주화와 더불어 불의한 부(富)의 축적의 척결이어야 한다. 특히 정치인과 고위 관료와 법조인과 재벌기업가들이 대상이다. 재벌기업들의 편법 상속과 일감 몰아주기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기대하지 않는다. 법을 준수하고 부동산 투기를 하지 않고 병역과 납세의 의무를 지키는 정도이면 감지덕지가 아닐까. 그저 서민이 지닌 정도의 법 감정을 지녔으면 하는 것이 국민의 솔직한 생각일 것이다.

대선 주자 가운데 새누리당의 유승민 의원이 내년 대선의 시대정신으로 ‘정의’를 내세운 것이 눈길을 끈다. 정의는 경제 민주화를 넘어선다. 마이클 샌델은 한동안 신드롬을 일으켰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우리 사회가 정의로운지 묻는 것은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 이를테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배분하는 것인지를 묻는 것이라고 했다. 소득과 부 등을 공정하게 배분하는 것뿐 아니라 지도층 인사들에게 의무를 다하게 해야 한다.

우리사회 지도층의 부정부패 실태를 보면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 1923~2015) 전 총리 같은 지도자가 나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1970년 이후 부패행위조사국을 총리 직속으로 두고 강력한 부패조사 활동을 펴도록 함으로써 싱가포르를 아시아에서 가장 깨끗한 나라로 만들었다. 9월 28일 발효되는 김영란법을 엄정하게 집행해야 한다. 지도층 인사들이 불의하게 부를 축적하는 것을 방치하고 더욱이 그들을 고위직에 계속 임명한다면 경제 민주화도 헛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오피니언타임스=황진선]

 황진선

 오피니언타임스 편집인

 가톨릭언론인협의회 회장

 전 서울신문 사회부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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