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기수의 중국 이야기]

막 한중수교가 이뤄졌던 1990년대 초, 나는 베이징 지사의 주재원으로 북한 사업을 겸하고 있었다. 사업이 사업인 만큼 북한에서 출장 나온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자주 있었는데 역시 동양 문화권에서는 술이 한 잔 들어가야 속에 있는 말도 하고 소위 끈끈한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법인지라 술집에서 함께 어울리는 경우가 많았다.

©신화/포커스뉴스

이즈음 중국에서도 가라오케가 대 유행이어서 식당이나 술집 할 것 없이 녹음 반주에 맞춘 노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중국 노래는 물론 웬만한 남한과 북한의 노래가 망라되어 있었는데, 그 때 나는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내 노래 차례가 되면 나는 당연히 노래책을 들고 심사숙고 끝에 내가 할 줄 아는 우리 노래를 골라 불렀는데 북한에서 온 친구들은 주로 그들 노래가 아닌 남한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노래 책을 보고 노래를 골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가라오케 기계에 나오는 남한의 노래를 나오는 대로 모조리 불러 젖혔다. 사실 당시 나는 북한의 노래를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 흔한 ‘휘파람’도 그 후에 알게 된 것이다. 당시만 해도 북한의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언감생심, 생각지도 않았고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 남한의 기업과 접촉할 수 있는 북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들은 철저히 훈련받은, 당성과 출신 성분이 남 다른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서로를 아는 데 대한 큰 차이에 적잖이 당황했다. 남한의 노래를 꿰고 있는 사람들과 북한의 노래를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의 차이, 상대방을 알고 있는 사람과 상대방을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의 게임은 공평할 수가 없다.

노래뿐만 아니라 그들은 남한의 사소한 부분까지 섭렵하고 있었다. 당시 ‘서울 불바다’ 사건으로 남북한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서울 한복판에 미사일 한 방이면 남한은 큰 혼란에 빠져 우리들끼리 서로 밟고 밟힐 것이라고까지 했다. 고층 아파트에 단수(斷水)가 되면 아파트는 거대한 공중화장실이 되고, 절전이라도 되면 서울 시내는 아수라장으로 변할 것이라고도 했다. ‘민족의 주체를 버리고 미제의 앞잡이 행세’로 돈은 좀 더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 대가로 면역력이 상실되어 ‘병약한 돈 벌레’로 전락했다는 말도 술기운을 빌려 서슴지 않았다. 1972년 남북 적십자 회담 당시 서울을 방문한 윤기복 일행이 서울의 빌딩 숲을 보자마자 남으로 전향할 것이라고 믿었던 수준의 나는, 그들이 뭐라고 해도 전혀 맞받을 수 없는 나의 대북(對北) 지식에 심한 자괴감을 느꼈었다.

상대방 입장에서 나를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誌)’는 소통의 절대적인 기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 하나는 내가 상대방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전혀 모르고 있다면 상대방의 입장 또한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역지사지’란 먼저 상대방을 이해하고 상대방을 알아야 한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대방을 아는 것에 인색하다. 모든 사람들의 머리에는 자기만의 지도가 있다고 한다. 그들은 상대방도 자기처럼 생각하고 자기처럼 행동할 것으로 철석같이 믿는다. 상대방의 생각과 행동이 나와 다르면 울분을 토하기까지 한다. 천안함, 연평도 사건 당시 ‘왜 중국은 북한편만 드느냐’고 비분강개했던 사람들도 이 부류에 속한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胎)’라고 했다. 손자병법 ‘모용’편에 나오는 ‘상대방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의 싸움에서 위태롭지 않다’라는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방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럴 생각도 없고 그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내가 소중하므로 남들도 나의 지도 속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은 나를 잘 알고 있는데 나는 상대방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무서운 일이다.

서로 잘 아는 사람끼리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으되 모르는 사람끼리는 껄끄러운 말을 할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해 우리는 북한을 잘 모른다. 중국에 대해서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금방 북한이 망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이나 서해안의 중국 불법 어선들에 대해서 ‘저자세 외교’라고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나 상대방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이다.

김정일의 사망 당시 수많은 북한 민중들의 울부짖음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만이 향후 남북한 관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고, 중국 정부의 고위층과 진정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만이 중국 정부에 우리의 큰 소리를 떳떳하게 전할 수 있는 것이다. 상대방을 알려고 하는 노력 없이, 모든 일에 내 생각을 우선한다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우리의 앞날은 더 고달파질지도 모른다. 상대방을 모르는 ‘역지사지’는 ‘역지사지’가 아니다.[오피니언타임스=함기수]

 함기수

 글로벌 디렉션 대표

 전 SK네트웍스 홍보팀장·중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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