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문화로 만나는 세상]

‘신신신야 의의역신야(信信信也 疑疑亦信也)’

순자(荀子)의 ‘비십이자(非十二子)’편에 나오는 말이다. ‘믿을 만한 것을 믿는 것이 신(믿음)이며, 의심할만한 것을 의심하는 것 또한 신(믿음)’이라는 얘기다. 순자는 ‘안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렇게 설파했다. ‘말을 해서 마땅한 것이 지(知)이며, 침묵해서 합당한 것이 또한 지(知)이다’라고.

믿음만 놓고 보자. 순자의 말은 믿을 만한 것은 믿어야 하지만, 반대로 합리적으로 의심할 만한 것은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짓과 부정이 있다면 이를 마땅히 의심해 사실을 밝히고 바로 잡아야 믿음이 세워진다는 얘기다. 정치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온갖 주장과 추측, 반박과 소문이 난무하고 있는 미르와 K스포츠, 두 재단과 함께 떠오른 구절이다.

21일 서울 강남구 K스포츠 재단 건물에 현판이 걸려 있다. K스포츠 재단은 최순실 씨가 재단 설립과 운영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포커스뉴스

과거 전례와 상황에 비추어 보면…

두 재단의 설립과정과 인사, 기업들의 석연찮은 기부와 운영에 언론이 관심을 가진 것은 최근이 아니다. 이미 두 달 전부터 한 케이블채널(TV조선)이 가장 빨리, 줄기차게 쏟아냈다. 그 일련의 보도는 같은 언론인, 시청자가 보기에도 막연한 폭로나 헐뜯기 수준이 아닌 믿을 만한 내용들이었다. 자료를 근거로 두 재단의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짚었고, 그 결과로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권력층의 개입을 의심했다. 충분히 제기할만한 문제였고, 순자의 말처럼 의심할만한 것을 의심한 것이다. 지금도 그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그 권력층이 지금 야권에 제기하고 있는 인물이란 ‘의혹’에는 ‘합리적’이란 수식어를 선뜻 붙이기가 쉽지 않다. 당사자들의 완강한 반발과 부정 때문이 아니라, 현재로는 아무런 근거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두 재단과 전경련에 제기되고 있는 갖가지 의심들은 분명 합리적이다. 그 합리성은 비록 증거는 없지만 비슷한 과거 전례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전경련이 언제부터 문화와 스포츠, 한식과 태권도 세계화에 이렇게 큰 애정과 관심을 가졌나. 재단을 그것도 한꺼번에 두 개 연거푸 만들 생각을 하다니. 경제인 및 경제 각 부문의 연결을 도모하고, 주요 산업 개발과 국제경제교류를 촉진함으로써 건전한 국민경제 향상과 발전에 이바지하려고 만든 친목단체인 전경련이 오지랖도 넓다. 하기는 ‘어버이연합’에까지 각별한 관심으로 몰래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무려 5억2300만원을 선뜻 준 전경련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20일 TV조선에서 ‘미르·K스포츠 재단’ 관련 의혹을 보도하고 있다. ©TV조선 방송 캡처

놀라움의 연속, 의문의 연속

놀랄 일은 또 있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기부과정을 보면 전경련은 기업에 막강한 입김을 행사하는 ‘갑’이다. 이승철 상근부회장의 말 한마디에 자신들과 무관한 재단에 군말 없이, 자발적으로 할당된 거액을 냈다. 평소에도 그랬나. 아무리 전경련이라도 군말 없이 돈을 낼 기업이 어디 있느냐, 부회장은 우리의 심부름꾼에 불과하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부회장 한마디에 현대 85억원, SK하이닉스 68억원, LG 48억원, 포스코 30억원, 롯데 28억원, GS 26억원, 한화 15억원, KT 11억원, 대한항공 10억원, CJ E&M 8억원, 두산 7억원, 대림산업 6억원, 금호타이어 4억원, 아시아나항공 3억원, 아모레퍼시픽 2억원 등 30개 기업(그룹)이 일제히 쌍수를 들고 환영하면서 미르재단에 486억원을 쾌척했다. 그것으로 성이 덜 찼는지 두 달도 안 돼 다시 19개 기업이 K스포츠재단을 만들라고 288억원을 주었다.

언제부터 우리나라 기업들이 이렇게 인심 좋고 마음이 넓어졌나. 경기침체로 경영 사정이 나빠 죽을 지경이라고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당장 기업이 쓰러질 위기에 있으면서도 ‘좋은 일’에 쓰겠다고 하자 주저 없이 거금을 낸다. 이쯤이면 우리기업들의 사회적 책임과 사회 공헌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더구나 그 돈을 누가 어떻게 쓰든 신경쓰지 않는다. 재단 이사장과 이사를 누가 맡든, 재단이 어디로 굴러가든 관심 없다. 자신들이 만든 재단으로 이렇게 세상이 떠들썩한데도, 자신들의 선의가 정치권에서 함부로 매도되고 있는 현실에 침묵하고 있다. 일개 심부름꾼이 “조만간 이사장과 재단 이름을 바꾸고, 사무실도 옮기는 대대적인 개혁”을 떠들어도 오불관언이다.

보수단체 회원들이 지난 4월26일 서울 영등포구 전경련회관 앞에서 전경련과 어버이연합의 뒷돈 의혹에 대해 입장을 밝힐 것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사람들이 ‘과거’를 떠올리는 이유

정부는 기업들이 자진해서 국정을 도울 재단을 만들겠다고 해서 신청 하루 만에 설립허가를 내주었다고 설명했다. 전경련, 기업들에게 입김을 행사하거나, 눈치를 준 적이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야당이 주장하는 청와대 실세나 비선 권력자의 개입은 터무니없는 억측, 정치공세라고 단호히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30년 전, 전두환 정권 때의 ‘일해재단’을 언급할까. 그때도 정부의 공식적인 설명은 “재계의 자발적 출연이었다”고 했다. 청문회에서 모금을 주도한 인물은 “강제모금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했다. 그것이 사실인지도 모른다. 누구도 “내라”고 하지는 않았다. “이러이러한 일을 하고 싶은데, 만들고 싶은데 좀 도와줄 수 있느냐”면서 “당신이 좀 나서주면 좋겠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니 강제가 아니라고. 그가 누군가. 바로 대통령의 심복 장세동이었다.

“내라”고 해야 꼭 강요는 아니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했느냐, 아니면 누가 시켜서 했느냐가 중요하다. 그것에 따라 의견도 강제가 되고, 강요도 무시할 수 있는 것이 기업이다. “내라고 하니까 내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서 냈다”는 고 정주영 현대회장의 말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 편하기 위해서가 자신의 양심에 대한 것이 아니라, 권력이나 힘을 의미한다면 기부가 아니라, 억지춘향이다.

지금 기업들의 침묵이 자칫 ‘진실’을 말했다가는 정 회장이 말한 ‘마음이 불편한’ 정도를 넘어 큰 화를 입지 않을까 두려워서는 아닐까. 정말, 권력 눈치 안 본,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은 순수한 기부이고, 자발적 아이디어였으며, 전경련 부회장의 요청뿐이었다면 당당하게 나서서 ‘사실’을 못 밝힐 이유가 없을 텐데. 지금의 의혹과 논란을 일거에 잠재울 수 있을 텐데.

청와대는 석연찮은 의혹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포커스뉴스

의심을 풀어야 믿음이 온다

기업은 자신에게 이익이 없는 곳에는 돈 한 푼 쓰지 않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사회공헌도, 적자를 감수하면서 스포츠구단을 운영하는 것도 결국 그것이 회사에 유·무형의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것을 욕할 수는 없다. 다만 특정권력과 결탁한 정경유착이 아닌 사회와의 ‘윈-윈’이어야 한다. 당시 두 재단에 기부한 기업 총수들 중에 누구는 수사를 받고 있었고, 누구는 구속 중이었고, 누구는 사면을 받았지만 여론의 화살을 맞고 있었고, 누구는 자기 배불리기로 지탄의 대상이었다.

믿음은 당사자가 정확하고 빠르게 의심을 풀어야 찾아온다. 그것을 무시한 채 ‘모르쇠’일관하거나, 제3자가 “아니요’라고만 외치면 의심은 점점 커진다. 일해재단의 전철을 밟을지 모른다. 순자의 말처럼 합리적 의심 역시 믿음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듯.[오피니언타임스=이대현]   

 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전 한국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저서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14세 소년, 극장에 가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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