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그시절 그노래]

가수 이난영(李蘭影, 1916~1965)이 1934년에 발표한 노래 중에는 ‘오대강 타령’(五大江打令, 김능인 작사, 문호월 작곡)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우리 국토에서 가장 대표적인 다섯 개의 강을 노래로 만들었는데요. 각절 두 줄씩, 도합 5절 가사로 이뤄진 노랫말에는 압록강, 두만강, 대동강, 노들강(한강), 낙동강이 담겨져 있지요. 한반도의 북, 동, 서, 중, 남을 흐르고 있는 강인데, 그야말로 우리 민족의 삶에서 진정한 젖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가운데서 낙동강에 해당되는 5절 가사를 더듬어 봅니다.

남쪽은 낙동강 곡식 실러 가는 물
이 쌀을 실어다가 님께 드리리
-이난영의 ‘오대강 타령’ 중 5절

이렇게 표현된 노래 가사는 영남 일대 너른 들과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낙동강의 필연적 관계를 담아내고 있네요. 근년에 출현한 ‘4대강’이란 말은 분단 이후 수자원의 효과적 관리를 위해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등 남쪽의 강만을 가리키는 말이니 ‘오대강’에 비해 한결 축소된 분류이고 또 정치적 목적성이 담겨진 말입니다. 오늘은 옛 신민요 ‘오대강 타령’에 나오는 낙동강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조금 풀어볼까 합니다.

황정자가 부른 처녀뱃사공 앨범 ©이동순

예로부터 낙수(洛水)라고도 일컫던 낙동강 명칭에는 가락국(駕洛國)의 동쪽을 흐르는 강이란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하네요. 강원도 태백의 함백산(咸白山)에서 발원해 영남의 중간지역 낮은 땅을 두루 굽이굽이 감돌아 남해로 흘러드는 도도한 흐름의 강입니다. 우리나라 강 가운데 세 번째로 긴 강이기도 합니다. 가야와 신라 천 년, 임진왜란에서 6‧25전쟁의 역사적 애환까지 고스란히 간직한 채 낙동강은 오늘도 묵묵히 흘러갑니다.

1950년대 중반, ‘부길부길(富吉富吉)쇼’란 이름의 유랑극단 운영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한 대중음악인이 있었습니다. 그 일행들은 경남 함안의 악양에서 공연을 마치고 다음 공연장으로 옮겨가기 위해 낙동강에 이르러 나룻배로 강을 건너게 됐습니다. 그런데 노 젓는 사공이 뜻밖에도 20대 처녀였네요? 악극단대표는 처녀뱃사공에게 내력을 물었는데 오라비가 군에 입대했고, 두 여동생이 번갈아가며 오빠가 하던 힘든 뱃사공 일을 계속하며 부모님을 모시고 있다는 애틋한 사연을 들었습니다. 가슴이 찡해진 극단대표는 이 사연을 가슴에 오래 담아두고 있다가 기어이 가요작품 하나를 만들었으니, 그게 바로 전체 한국인들이 즐겨 부르는 애창곡 ‘처녀뱃사공’(윤부길 작사, 한복남 작곡, 황정자 노래)입니다.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
군인 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큰 애기 사공이면 누가 뭐라나
늙으신 부모님을 내가 모시고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낙동강 강바람이 앙가슴을 헤치면
고요한 처녀가슴 물결이 이네
오라비 제대하면 시집 보내마
어머님 그 말씀에 수줍어질 때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황정자의 ‘처녀뱃사공’ 전문

그 악극단대표가 누구냐면 바로 충남 보령에서 태어난 천재적 대중예술가 윤부길(尹富吉, 1912~1957)입니다. 한국 최초의 개그맨으로도 불리는 그는 작사, 작곡, 연주, 시나리오 집필, 희극배우 등의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과 기량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습니다. 경성음악전문학교(현 서울음대)를 다닌 윤부길은 젊은 한때 충남 안면도에서 음악교사 생활을 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평소 가수가 되고 싶은 꿈을 갖고 있었지만 노래보다는 연극 쪽에 한층 소질이 확인되었고, 관중을 사로잡는 명연기자, 재치와 유머감각이 뛰어난 원맨쇼의 개척자로서 풍자적 개그 쇼의 솜씨론 윤부길을 따라올 사람이 아무도 없을 만큼 독보적인 평가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전쟁 끝의 험한 시절이라 극장공연만으로는 생계를 잇기 힘들었고, 악극단을 꾸려서 전국 방방곡곡을 바람처럼 떠돌며 그날그날의 삶을 연명해갔습니다.

윤부길의 아내 고향선(高香仙, 본명 성경자)은 비록 전설적 무용가 최승희(崔承姬, 1911~1967)의 제자로 성장했지만 유랑연예인 남편을 만나 무명의 악극배우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들(윤항기, 윤복희)이 태어났지만 늘 남의 집에 맡겨두고 어쩌다 겨우 만날 뿐 부모노릇을 제대로 해낼 도리가 없었지요. 이런 고난 속에서 윤부길은 고질적 병력과 영양실조를 이겨내지 못하고 여러 해 파란과 굴곡을 겪다가 마침내 45세의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홀로 남은 아내마저도 악극단을 따라 떠돌다가 병을 얻어 동해안 묵호에서 객사(客死)하고 말았습니다. 낯선 강원도 묵호의 산언덕 황토구덩이에 윤복희 어머니가 묻히던 날, 악극단 동료단원들은 북과 나팔, 애달픈 바이올린 선율로 슬픈 장송곡(葬送曲)을 연주하며 마지막 길을 떠나보냈다고 합니다.

흐릿한 흑백실루엣에 담긴 그날의 사진 한 장은 삶의 벼랑 끝에 서있던 1950년대 전체 한국인들의 처연하고 가파르던 심정을 생생하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부모를 한꺼번에 잃고 졸지에 고아가 된 오누이의 애달픈 생애는 어쩌면 그 이전부터 이미 운명적으로 펼쳐지고 있었던 지도 모릅니다.

노래 ‘처녀뱃사공’ 중 우리의 가슴을 오래 짠하게 하는 대목은 오라비가 군에 가고 없는 농촌의 가정에서 늙은 부모를 자신이 모시겠다고 말하는 처녀뱃사공의 다짐입니다. 하지만 역시 앳된 처녀인지라 자신의 혼례이야기만 듣고도 두 볼이 발그레 달아오르는 광경은 진정 아름다운 한 폭의 한국화(韓國畵)라 하겠습니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황정자(黃貞子, 1927~1968, 본명 황창순)입니다. 서울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8세 때부터 이동 순회극단의 막간가수로 무대 활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깜찍하고 또랑또랑한 발음과 박력과 애교가 느껴지는 창법으로 대중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일찍부터 천재소녀가수란 평을 얻었습니다. 마치 쇳소리의 여음을 듣는 듯 경쾌하고 발랄한 성음(聲音)의 울림이 놀라운 흡인력으로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주로 신민요풍의 노래를 불렀는데, 무대에서 장구와 꽹과리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면 한껏 달아오른 관중들의 환호에 극장이 떠나갈 듯했다고 합니다. 황정자의 여러 노래들은 나라 잃은 식민지백성들의 깊은 한과 서러움을 부드럽게 달래고 어루만져주었습니다.

1940년 ‘살랑춘풍’ ‘약산진달래’ 등을 발표하면서 황정자는 본격가수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학교를 다니지 못했으나 워낙 총명하여 악보와 대본을 순식간에 암기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1954년은 황정자에게 매우 특별한 해였습니다. ‘노랫가락 차차차’가 발표되어 세상의 인기를 온통 독점하다시피 했기 때문이지요. 황금좌, KPK악극단, 성보악극단, 국도 쇼 등에서 황정자는 항시 중심 가수로 활동했습니다. ‘오동동타령’ ‘살랑춘풍’ ‘비오는 양산도’ ‘신이별가’ ‘봄바람 님바람’ ‘실버들 타령’ ‘노들강변 6백년’ 등의 대표곡으로 가요계에서는 과거의 이화자(李花子, 1916~1950), 황금심(黃琴心, 1912~2001) 등과 함께 3대 민요가수로 손꼽힐 정도였지요. 그러다가 1959년 32세의 나이로 발표한 ‘처녀뱃사공’은 가수 황정자의 위치를 단연 최고의 자리에 우뚝 자리 잡게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최고의 신민요가수로 명성을 날리던 황정자에게도 마침내 시련과 불행이 찾아왔으니 그것은 가족들과의 생이별입니다. 건강이 불안정하게 되면서 남편과 이혼하고 사랑하는 두 아들마저 남편에게 빼앗겨 버렸지요. 이러한 충격으로 황정자는 정신적 타격을 받으면서 기억상실증에 정신이상증세까지 겹쳐 경기도 의정부의 어느 극장에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황정자의 존재는 대중들의 기억에서 급격히 잊히고 말았습니다. 극도의 고립과 단절 속에서 그녀의 병은 점점 심해져만 갔고, 대전의 어느 정신요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바람결에 들리더니 마침내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홀연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습니다. 인기가수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너무나 안타깝고 불행했던 경우이지요. 거의 무연고자와 같은 신세로 장지(葬地)를 향해 영구차가 떠나는 시간에도 뒤따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돌보는 이 없이 쓸쓸히 세상을 떠난 황정자씨 사망 기사 ©이동순

‘처녀뱃사공’을 작사한 천재적 대중연예인 윤부길 부부와 이 노래를 부른 가수 황정자, 왜 모두들 불행의 극단에서 고통을 받다가 서둘러 세상을 떠난 것일까요? 세상의 온갖 혼돈과 아픔을 그 누구보다도 일찍 예견하고 마치 무병(巫病)을 앓듯 시름시름 넋을 잃고 있다가 자신에게 다가온 불행과 고통을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다른 이들의 고통까지 함께 껴안은 채 먼저 구천(九天)의 세계로 떠나버린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해마다 훈훈한 강바람이 불어오는 봄날이 되면 아련한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어디선가 또랑또랑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황정자의 정겹고도 구수한 성음으로 듣는 ‘처녀 뱃사공’입니다. 이 노래에는 한국인의 한과 애수가 은연중에 묻어나는 기막힌 여운(餘韻)이 작용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지요. 불행하게 세상을 떠난 가수 황정자의 한 많은 영혼은 지금 어디를 헤매고 있을까요? 필시 비오는 낙동강변 어딘가를 혼자 쓸쓸히 바람결처럼 떠돌고 있을 것입니다. 후배가수 오승근(1951~ )이 이 노래를 리바이벌해서 음반을 내었고, 크게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후로 젊은 가요팬들은 노래 ‘처녀뱃사공’을 마치 오승근이 처음 부른 것으로 잘못 아는 경우마저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이젠 이런 잘못된 사실을 반드시 수정하고 제대로 알아둬야겠습니다. 오승근 이전에 황정자가 먼저 ‘처녀 뱃사공’을 불러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는 분명한 사실을 말입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처녀 몸으로 힘겹게 가장 역할을 도맡아가며 노부모까지 봉양하고 있는 갸륵한 미혼여성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면서 가수 황정자가 구성지게 엮어가는 ‘처녀뱃사공’ 노래를 선물로 보내드리고자 합니다.[오피니언타임스=이동순]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   

  계명문화대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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