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공모전 아차상]

초점을 잃은 눈빛. 피투성이가 된 아이의 손. 그리고 절망. 영화 ‘덕혜옹주’ 속 덕혜옹주는 이들의 모습을 지나치지 못한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친일연설을 할 것을 강요받았던 그녀는 연설을 멈추고 ‘우리의 언어’, 한국어로 연설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들여다보았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 그리고 아파하고 절망하는 국민 개개인의 절망한 삶을. 위로란 그런 것이다. 내 삶의 공간을 벗어나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여행. 지금 우리 사회의 ‘공감의 여행’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덕혜옹주 스틸컷 ©네이버영화

온전히 내가 타인이 되는 ‘공감’의 발현은 쉽지 않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시간, 공간을 온전히 그 자신처럼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일제강점기 하에 ‘위안부’로 끌려간 소녀들의 시간을. 우리는 그 당사자만큼 아파하고 느낄 수는 없다. 어쩌면 내가 온전히 타인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건. 타인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공감력’이 늘어날수록 나와 타인은 연결되고 ‘공동체’는 더 견고해진다는 것이다. 우리를 묶어주는 그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순간. 나 혼자 살아남는 ‘각자도생(各自圖生)’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타인의 공간으로 건너가기를 거부한다. 아파도 위로를 구하지 않고, 남의 고통마저 모른척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그 결과 골방의 개인들은 늘어만 간다. 독거노인이 홀로 죽음을 맞이한 지 몇달이 지나서야 발견되고, 청년은 취업, 연애, 결혼, 출산 모두를 포기한 채 ‘혼자놀기’에 열중한다. 가장 사회의 취약한 지점에서 마주하는 노인과 청년의 강요된 혼자놀기. 이른바 현재의 ‘혼놀’은 놀이라기보다 관계의 단절에 가깝다. 그래서 감정의 공유, 그리고 ‘연결됨’은 일어나지 않는다.

8월20일 경기 안산 단원고등학교에서 세월호 참사 당시 2학년 학생들이 사용하던 ‘기억교실(존치교실)’ 이전 작업이 진행된 가운데, 유가족들이 슬픔에 잠겨 있다.©포커스뉴스

문제는 이처럼 개인화된 사회가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까지 위협한다는 것이다. ‘나 혼자만 잘 살자’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만 가득한 사회. 그러한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오래가지 못한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뒤에도 이처럼 개인화된 사회가 존재했다. 경쟁에서 뒤처진 젊은이들이 신분상승의 노력조차 하지 않고 저임금 노동자로 안주한 채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다. 개인은 각자 살아남는 법에만 몰두했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사회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장기침체의 악순환을 낳은 주범으로 지적된다. 공감이 무뎌진 사회를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이유다.

당신의 삶으로 건너가기. ‘공감의 여행’은 우리 사회를 채워야 한다. 나의 고통만이 아닌 타인의 고통을 느끼고. ‘함께’의 미래를 고민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의 일에 무관심한 이기심의 ‘개인주의’가 아닌 개인의 개별성을 존중하는 ‘개인주의’다. 국가 혹은 사회가 정한 하나의 정답에 따라 모두가 좁은 구멍으로 내달리고 그 정답에 맞지 않는 개인은 실패한 삶으로 규정되는 사회에는 이기심의 개인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국민 대다수는 불행하다.

국가는 들여다봐야 한다. 왜 국가는 성장해도 개인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지. 길가에 파지 줍는 노인은 왜 늘어만 가는지. 2조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해도 청년일자리는 왜 늘어나지 않는지. 더 많이 듣고, 공감하고, 더 치열하게 논의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각자도생’이 아닌 ‘함께 살아냄’이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위로’다. 그래야 우리는 타인의 삶으로 건너갈 수 있다.[오피니언타임스=문정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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