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웅의 촌철살인]

거리를 걷다 보면 발길에 차이는 게 ‘일수 명함’이다. ‘급전 대출’을 권유하는 명함 형태의 대부업 광고다. 이 명함들을 보며 떠오르는 노래가 있으니 현인이 부른 ‘서울야곡’(1948)이다. 옛사랑을 추억하는 이 노래에서 충무로, 보신각, 명동 거리 풍경은 정겹고 낭만적이다.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로 시작하는 노래 3절엔 이런 가사도 나온다. “네온도 꺼져가는 명동의 밤거리에/ 어느 님이 버리셨나 흩어진 꽃다발…”. 그러나 지금 거리에 그런 낭만이라곤 없다. 대신 우리를 맞는 것은 흩어진 일수 명함들이다.

시장·상가에서 만나는 일수 명함은 ‘누구나대출’, ‘현주엄마 일수’, ‘벅찬 감동’, ‘이모네 일수’, ‘아줌마 급전’ 등 이름도 다양하다. 상인들은 투덜대며 치우지만 곧 다시 쌓인다. 문 닫은 상점 앞에는 수십 장씩 나뒹군다. 명함 전달 방식도 달라졌다. 상점이나 가정을 다니며 일일이 뿌린 옛날과 달리 지금은 불특정 다수를 겨냥해 거리에 닥치는 대로 살포한다.

그러다 보니 민원도 발생한다. 지난여름 서울 성심여중고 학생과 교사들이 국회에 낸 용산 화상경마장 추방 입법청원엔 이런 내용도 있다. “조용하고 살기 좋던 저희 동네 길거리는 알 수 없는 명함들로 지저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일수, 급전 등등, 돈을 빌려준다는 전단지들은 학교 교문부터 집 사이까지 골목을 더럽히기 시작했습니다….” 명함이 공해가 된 것이다.

궁금한 건 ‘이렇게 마구 뿌려도 되나’이다. 알아보니 경찰이나 지자체가 단속을 안 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러나 미등록 오토바이들 타고 다니며 뿌리기 때문에 적발이 어렵다고 한다. 또 현장에서 붙잡아도 경범죄처벌법상 벌금 5만원 부과 정도에 그친다. 엄밀하게는 옥외광고물관리법 위반으로 최고 과태료 500만원을 부과할 수 있지만 그런 사례는 없다. 불법 사업자, 전주에 대한 처벌은 더욱 엄두를 못 낸다.

지난달 말 금감원에 따르면 국내 대부업체는 9932곳에 달한다. 등록 대부업체가 그렇고, 미등록 업체도 2000여 곳으로 추정된다. 그 수가 너무 많고 증가 추세도 엄청나다. 지난 4년 사이 대부업체 신규 등록건수는 2012년 75개였는데 2016년 9월 현재 3285개로 약 44배나 증가했다. 대부잔액은 지난해 말 13조600억 원으로, 2012년 8조7000억 원에 비해 4조5600억 원(52%)이나 늘어났다.

조금만 더 수치를 나열한다. 이 대출의 62%는 가계생활자금으로 이른바 생계형 대출이었다. 지난해 약 33만 명이 평균 3209만원, 총 10조5천억 원의 불법 사금융을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평균 이자는 연 114.6%였다. 이용자는 주로 월 소득 100만~300만원 미만의 블루칼라들이었다.

합법·불법을 다 합치면 대부업체는 1만2000개 정도라는데, 이게 얼마나 많다는 건가. 책방과 비교해 보면 감이 잡힌다. 국내 서점은 1995년 총 5549개이던 것이 2015년 말 2116개로 줄었다. 몇 해 전엔가 대부업체 수가 책방 수를 넘어섰다는 기사를 읽었는데, 지금은 비교 자체가 안 된다.

주요 고객은 누구인가. 그들이 뿌린 명함에 나와 있다. ‘신용불량자 가능, 자영업자 100% 대출, 무보증 무담보, 당일 대출 가능, 업소여성 환영’. 한마디로 사회적 약자들이다. 신용등급이 낮아 카드대출마저 받을 수 없는 사람, 유흥업소 종사 여성 등이다.

“목돈을 쉽게 받으시고 조금씩 부담 없이 갚을 수 있습니다.” 당장 급전이 절박한 사람들에게 이런 선전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그러나 그 유혹 때문에 더 깊은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진 수많은 사연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혹시 이런 게 후보시절 누군가가 공약했던 지하경제의 활성, 아니 양성화일까. 아니다. 철저히 약자 등쳐먹기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런 식으로 방치되는 데는 그런 현실을 용인하는 사회심리가 깔려있다고 본다. 이 사회가 약자를 배려하는 곳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살포되는 일수 명함에는 거리 미관을 해친다거나 상인들이 불편한 것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다. 이 시대의 자화상이며 풍경화라는 의미다. 어떤 시대인가. 양극화가 심화하는 시대다. 경제가 곤두박질치는, 가계부채의 경고음이 요란한 시대다. 일수 명함들은 오늘도 뿌려져 시대의 팍팍함을 드러내는 ‘물증’이 될 것이다.[오피니언타임스=김철웅]

   김철웅

    전 경향신문 논설실장, 국제부장, 모스크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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