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요의 미디어 속으로]

KBS 당진송신소에 가면 로비 초입에 삽 하나가 전시되어 있다. 1979년 10월 26일 당진송신소 개소식을 기념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기념식수를 했던 삽이다. KBS 당진송신소는 대북방송 전파를 송출하는 송신소다. 밤에 출력하는 1500kW는 국내 최대 출력으로 평양방송 중화 송신소와 같은 세기다. 북한은 물론이고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몽골,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까지 청취가 가능하다. 대북 방송이기 때문에 당진송신소 공사는 당시 중앙정보부의 필요에 따라 진행된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KBS는 지금도 이 방송 관련 비용을 국고로 충당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이곳에서 기념식수를 하고 대북방송 현황도 보고받았다.

KBS 당진송신소 로비에 전시되어 있는 박정희 기념식수 삽 ©이상요

박정희 대통령이 치른 마지막 대외행사

청와대 경호일지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26일 아침 10시 27분 전용헬기로 청와대를 출발, 11시에 삽교호 방조제 준공행사에 참석하고, 12시 10분 KBS 당진송신소 준공식에 참석하여 기념식수를 한 다음, 12시 45분 도고호텔에서 오찬을 한다. 오후 2시 30분에 청와대로 돌아와 저녁 6시 궁정동 안가로 이동, 저녁 7시 50분에 만찬 중 서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진송신소 개소식 참석이 박대통령이 치른 마지막 대외행사였다.

현직 대통령 시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게 됐을까? 1995년 경, 나는 김재규 동생 김항규와의 인터뷰를 시도한 적이 있다. 김재규는 평소 동생 김항규를 자랑스러워 했고 시해를 결행하기 전에도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가장 마지막으로 김재규를 면회한 사람도 그였다. 그가 병 때문에 오늘 내일한다는 것이다. 그 전에 어떻게든 그를 만나 그 당시 떠돌던 많은 의문의 실마리를 찾고 싶었다. 1997년 5월30일 그가 작고할 때까지 결국 나는 인터뷰를 성사시키지 못했다. 지금까지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1979년 12월18일 군사법원에서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유튜브

헬기 탑승자에서 빠진 김재규 중정부장

동아일보 2013년 8월 30일 기사는 김계원 비서실장의 증언을 통해 이날 아침 상황을 전하고 있다. 삽교호 방조제 행사장으로 가기 위해 경호실에서 3대의 헬리콥터를 준비했다. 그런데 팁승인원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빠져 있었다. 김계원 비서실장이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물었더니 ‘안전운항을 위해 중량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는 답변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삽교호 행사를 마치고 대통령 헬기가 KBS 당진송신소에 도착했을 때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육로로 천안을 거쳐 허겁지겁 달려왔다는 것이다. 김계원 실장이 보기에 “김재규는 화가 단단히 나 있었다”고 한다.

기사는 최서영 당시 KBS 방송담당 이사의 말도 전하고 있다. 행사 전날인 25일 경호실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대통령은 예정대로 참석하지만 정보부장이 빠지게 되었으니 방송사 측도 참석인원을 줄이라는 통보였다...중앙정보부가 주동이 되어 만든 시설 준공 행사에, 그것도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에 정보부장이 빠진다는 것은 납득이 잘 되지 않았다...내가 듣기로는 김 부장이 당진송신소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온갖 준비를 다 해놓고 있었는데 갑자기 참석하지 말고 부마사태에 대비하라는 연락을 받자 책상을 내리치며 분개했다는 것이다.”

속전속결로 집행된 사형

김재규는 보안사령부에 체포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그후 7개월 만인 1980년 5월20일 대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그 4일 후에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구속된 지 7개월만에, 또한 사형판결을 받은 후 4일만에 사형이 속전속결로 집행된 것이다. 김재규는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최후진술을 남겼다.

알려진대로 김재규 최종심은 대법원 14인 전원합의체로 진행되었다. 선고공판 사흘 전인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령이 내려졌고, 5월 18일에는 광주민중항쟁이 발발했다. 공판일 당일에는 탱크가 대법원 앞에 버티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표결에 부친 결과 8 대 6으로 상고기각 결정을 내렸다.

KBS 당진송신소 박정희 방문 기념비 ©이상요

‘내란목적 살인’인가, ‘단순살인’인가

다수의견은 ‘내란목적 살인’이고, 6인의 소수의견은 ‘단순살인’이라는 것이었다. 소수의견은 암살 후 김재규의 동선이나 행동이 너무나 허술해 우발적인 행위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잡으려 했던 신군부는 권력 찬탈의 정당성을 위해 ‘내란목적’을 필요로 했다. 소수의견을 냈던 대법관 여섯 명 중 다섯 명은 그후 의원면직 형식으로 대법원을 떠나냐 했다. 적극적인 의견은 개진하지 않고 소수의견에 가담만 했던 한 명은 이때 사표를 강요받지 않았지만 결국 재임명에서 탈락했다.

김재규 변호를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는 신군부가 5월 17일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이유를 “5월20일 김재규에 대한 사형 판결이 내려지면 대대적인 데모가 행해질 것으로 보고 이를 미연에 피하기 위하여”였다고 언급했다.

실제로 김재규와 그 부하들에 대한 구명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김수환 추기경과 가톨릭 교회가 서명 운동에 나섰고, 윤보선 전 대통령, 함석헌, 문익환 목사 등을 비롯한 재야인사들도 구명 운동에 나섰다. 구명운동은 미국 등 해외에서도 거세게 일어났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그에 대한 사형집행은 비상계엄 전국확대, 광주민중항쟁 등 엄청난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당시에는 잘 인식되지 않은 채 묻혔다. 그러나 그 흔적은 당진에 조그마하게 남아있다. 만약 삽교호로 출발하는 헬리콥터에 김재규가 탑승했더라면, 그가 천안을 거쳐 육로로 헐레벌떡 당진송신소로 나타나지 않아도 되었더라면 궁정동 총격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 일로 그가 화가 단단히 나지 않았더라면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그의 ‘야수성’은 더 후에 폭발했을까? 그래서 역사가 달라졌을까?[오피니언타임스=이상요]

 이상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보도교양특별분과 위원

  전 <KBS스페셜> 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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