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리의 방과후옥상]

지난 10일,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영화 ‘자백’을 봤다. 그리고 글을 쓰기로 다짐했다. 영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정치 성향에 대한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영화 엔딩 장면에는 간첩으로 조작 혹은 기소됐으나 무죄로 판명 받은 이들의 명단이 자막으로 흘러 나왔다. 사법부에 무죄로 판결한 이상, 그들은 국가 권력의 피해자다. 하지만 그 누구도 사과하지 않는다.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 ‘자백’ 포스터 ©네이버영화

나는 영화가 끝나고 책 한 권을 떠올렸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아이히만은 나치 통치 당시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인 학살 계획의 실무를 책임졌던 인물이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은 상관의 지시에 따랐을 뿐, 사람 죽이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고 일관된 주장을 펼쳤다. 그를 지켜본 정신과 의사도 그가 정상이며 심지어 준법정신이 투철한 국민이라고 평가했다. 한나 아렌트는 이점에 주목했다.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가 주장한 아이히만의 죄는 직접적인 살인죄가 아닌 ‘생각의 무능’이었다.

영화 ‘자백’에서는 간첩으로 의심 받은 유우성씨가 무죄로 판명 받기까지의 과정이, 재일동포였던 김승효씨가 조사 과정의 트라우마로 지금까지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모습이, 그리고 그들을 유죄로 몰아간 국가정보원의 수사관들이, 대법원 앞 검사들이, 전 국가정보원장이 나온다. 수 년간의 재판 과정에서 생긴 의혹들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지 못한 그들은 어쩌면 그냥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한 사람들일 것이다. 주어진 일을 아는 대로 최선을 다했을 뿐, 유우성씨를 비롯한 간첩 용의자들에게 악의가 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영화가 끝날 때까지 피해자는 있지만 사과하는 이는 없다. 난 또 한번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생각의 무능’을 떠올렸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생각의 무능. 영화에서만의 얘기가 아니다. 선장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고 되풀이하는 선원들, 후임 관리와 기강 확립이라는 명목 하에 가해지는 군대 구타, 분위기에 휩쓸려 동급생을 구타하는 학교 폭력, 회사 부하에게 가르친다는 이유로 거리낌없이 내뱉는 모진 말, 널 사랑하니까 널 위해서라는 말 뒤에 숨겨진 데이트 폭력 및 가정 폭력. 상황은 다 다르지만 모두에게 해당되는 죄가 있다면 그 역시 ‘생각의 무능’일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강조한 ‘생각의 무능’ ©EBS방송 캡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문득 무서웠다. 나는 과연 생각의 무능을 저지르지 않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지. 영화를 보면서, 책을 보면서, 지금 이 글을 쓰면서까지 줄곧 악의 평범성을 생각한 내가 사실은 지극히 평범하단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생각한다. 숨막히게 꽉 찬 출근길 지하철에서, 점심을 먹고 양치질을 하다가도, 재미있는 글귀를 읽다가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길 지하철에서, 말하기나 행동의 무능을 선보이진 않았는지 생각한다. 그러다 생각이 한 우물에 고일까 다시 생각을 한다. 그래도 한 우물에 고일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말하기의 무능을 고치려고 한다.

한나 아렌트는 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악이란 뿔 달린 악마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 아니며, 사랑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우리 가운데에 있다. 그리고 파시즘의 광기든 뭐든 우리가 악을 행하도록 계기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멈추게 할 방법은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렇다. 평범한 우리가 ‘그것’을 멈추게 할 방법은 ‘생각’하는 것뿐이다. 데카르트의 말을 조금 바꿔 인용하며 글을 마치겠다.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고로 존재한다.[오피니언타임스=김규리]

 김규리

 마구 휘두르는 펜은 칼보다 위험합니다. 펜으로 노래하듯 글을 제대로 휘두르는 펜싱선수를 꿈꿉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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