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철 석탑 그늘에서]

엊그제 찾은 경주는 한적하기만 했다. 지난 9월 12일 규모 5.8의 지진이 일어난 뒤 줄곧 이랬다고 한다. 언제나 자동차로 붐비던 불국사 주차장이나 국립경주박물관 주차장에도 버스 한 두 대와 승용차 몇대가 고작이었다. 식당 주차장들은 더욱 썰렁했다. 그래도 지진 직후 관광객이 전혀 없다시피했던 때와 비교하면 찾는 사람이 늘어난 것이라고 했다. 관광산업으로 먹고 사는 경주 시민들은 고통받고 있었다.

이차돈 순교비와 순교비 그림을 확대한 모습. ©서동철

지진에 이력 난 일본 관광객들, 여행의 계절 맞아 경주에서 환대받아

반면 계획을 바꾸지 않고 경주를 찾는 관광객은 어느 때보다 환대를 받았다. 점심을 먹으려 찾은 감포항의 밥집은 인정이 넘쳤다. 한 사람에 만원씩인 생선찌개에는 제철에 접어든 곰치와 가자미가 풍성하게 들었고, 그것도 모자라 주인 할머니는 “얼마든지 더 드릴 테니 많이 드시라”며 웃음지었다. 이런 친절의 최대 수혜자는 일본 관광객들이었다. 잦은 지진에 면역이 이루어진 때문인지 경주 지진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투로 거리를 활보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경주를 여행하는 가장 좋은 시점이다. 마침 어디론가 떠나기 가장 좋은 계절이 아닌가. 다만 경주에 자주 가 본 사람에게는 안압지라는 이름이 익숙한 ‘동궁(東宮)과 월지(月池)’와 국립경주박물관을 거쳐 불국사와 석굴암에서 마무리되는 수학여행 코스는 아무래도 흥미가 떨어지는 게 문제다. ‘살아 있는 노천박물관’이라는 남산이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하고는 있지만, 그것도 한두번이다. 노부모님이라도 모신 여행길이라면 남산은 더욱 어렵다.

그래서 신라 역사를 새로운 방법으로 반추해 볼 수 있는 여행 코스를 하나 제안해 본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바탕에 불교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신라가 불교를 국교(國敎)로 받아들이는 데 한 젊은이의 순교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스토리는 교과서에도 소개되어 있다. 이차돈(異次頓)이라는 인물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성은 박(朴)이고, 이름은 염촉(厭觸)이다. 순교 당시 나이는 22세에 불과했다. 이번 여행의 중심축(軸)이 그다.

흥륜사 정문 ©서동철

신라 역사를 반추할 수 있는 이차돈 순교 여행

흔히 ‘불교의 공인’이라는 표현을 쓰지면 정확하게는 ‘불교의 국교화’나 ‘불교의 국교 공인’이라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국교를 불교로 공인한 인물은 법흥왕이다. 교과서는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공인했다고 적고 있다. 실제로 법흥왕(法興王)이라는 묘호부터가 율령을 정비한 임금이라는 차원이라기 보다 부처님의 가르침, 곧 불법(佛法)을 융성시킨 임금이라는 의미를 지녔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이 법흥왕의 최대 업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시기는 이런저런 이설(異說)이 있지만 가장 늦은 눌지왕(417~457)대 전래설(說)을 취하더라도 공인까지는 한 세기 남짓한 세월이 흘렀다. 신라가 이미 토착신앙으로 사상적 통일이 이루어져 있었던 국가였기에 시간이 필요했을 것으로 학계는 분석한다. 새로운 사상이 뿌리내리려면 기존 사상과 충돌이 불가피한데, 신라는 토착신앙이 고구려나 백제보다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던 탓에 저항이 더욱 강력했다는 것이다

신라 왕실이 토착신앙을 대신하여 불교를 국가의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삼으려했던 데는 지극히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다. 지역 토착 세력이 권력을 분할하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벗어나 오늘날 용어로 명실상부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받돋움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보니 불교가 가진 이념이 아주 매력적이었다. ‘왕이 곧 부처’(王卽佛)라는 사상이 그것이다.

흥륜사의 순교비 ©서동철

법흥왕, 이차돈을 희생양으로 토착세력 물리치고 불교 진흥

신라 최초의 사찰을 ‘대왕흥륜사’라고 명명한 것부터가 그렇다. ‘흥륜’에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치세를 일으켜 세운다는 뜻이 담겨 있다. 전륜성왕은 부처의 법으로 세상을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존재를 말한다. 법흥왕의 조카인 진흥왕은 아예 전륜성왕이 되고자 했다. 진흥왕은 두 아들의 이름을 동륜과 금륜으로 지었는데, 역시 전륜성왕의 각 단계를 뜻한다. 나아가 동륜의 아들인 진평왕과 그의 왕비는 부처의 부모인 백정과 마야부인을 자처했다. 진평왕의 두 동생도 부처의 숙부인 백반과 국반으로 이름지었다.

그런데 이차돈은 왜 죽었을까. 이차돈에게 일종의 명령 위반 혐의를 씌워 사형에 처한 것은 귀족들이 아니라 불교 진흥에 뜻을 같이 하던 법흥왕이다. 학계는 직접적 이유로 천경림(天鏡林)에 주목한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천경림은 기존 토착신앙의 성스러운 공간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차돈이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뜸 이곳에 대형 사찰을 지으려 했으니 엄청난 반발은 불가피했다. 법흥왕은 이차돈을 희생양으로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이미 불교에 호감을 가진 귀족 계층이 적지 않게 늘어난 상황에서 이 사건은 불교를 허용하는 쪽으로 여론을 몰고간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차돈이 죽은 뒤 천경림에 세워진 사찰이 바로 대왕흥륜사다.

백률사 금동불 ©서동철

천년 왕궁터 월성 전망대와 국립경주박물관의 이차돈 순교비

‘신라의 불교 공인’과 관련해 이런 배경 지식을 가지고 여행을 시작해 보자. 신라의 정치적 중심지인 월성을 출발점으로 권한다. 새로운 종교의 공인을 놓고 논쟁을 벌인 곳도 월성이고, 이차돈을 사형에 처한 현장도 그 주변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신라 천년의 왕궁터는 지금 발굴조사가 한창이다. 월성 북편에는 발굴 현장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가 세워졌다. 전망대에 서면 멀리 남산이 보인다. 신라인들이 왜 남산을 성스러운 공간으로 여겼는지, 정작 남산에서는 느낄 수 없지만 이곳에서는 실감할 수 있다.

지금 이차돈의 흔적을 가장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간은 뜻밖에 국립경주박물관이다. 신라역사관 제3전시실 한복판에는 이차돈의 순교 설화를 담은 높이 106㎝의 아담하지만 당당한 비석이 하나 있다. 헌강왕 10년(818)에 만들어진 6각형 조각으로 지붕돌이 사라졌지만, 미완성이라는 느낌보다는 여느 불교 조각과는 차별화된 현대적 분위기가 감돈다.

순교비의 한 면에는 순교 설화가 전하는 대로, 이차돈이 처형되는 순간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잘린 목에서는 젖빛 피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 땅이 울리는 모습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나머지 다섯 면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칸을 질러 설화의 내용을 글자로 새겼다.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많지만, ‘삼국유사’의 순교 설화 내용과 엇비슷하다고 한다.

순교비에 여운이 남았다면 당초 이 비석이 세워졌던 곳을 찾아보자. 순교비는 일제강점기 경주 북쪽에 있는 소금강산의 백률사(栢栗寺)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한때 순교비가 ‘백률사 석당’이라고 불리운 것도 이 때문이다. 경주박물관에는 순교비가 수습되기 이전인 1914년 3월에 현장 주변을 찍은 사진도 남아있는데, 처형 장면을 조각한 비면이 하늘을 향한 채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다. 지붕돌은 사진에도 보이지 않는다.

백률사 마애탑 ©서동철

순교비가 있었던 백률사와 이차돈 순교 후 세워진 흥륜사

백률사는 경주박물관에서 포항으로 가는 국도로 방향을 잡아 달리다 시내를 막 벗어나면 나타나는 동천동 소금강산에 자리잡고 있다. 산길을 조금 올라야 하지만 험하지는 않다. 소금강산은 망나니의 칼에 잘려나간 이차돈의 머리가 한참을 날아가 떨어진 자리다. 옛 이름을 자추사(刺楸寺)로 추정하는 백률사는 이차돈을 추모하고자 순교 직후 세워졌다고 한다.

백률사는 산중암자라고 해야 좋을 작은 절이다. 대웅전과 요사채 말고 다른 전각을 세울 공간조차 찾기가 어렵다. 대웅전 동쪽 바위에 높이 3.2m의 삼층탑을 새겨놓았는데, 탑을 세울 자리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신라의 국가적 인물을 기리기에는 조금 옹색해 보이기도 하지만, 경주박물관에 있는 국보 제28호 백률사 금동여래입상이 여기에 모셔져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통일신라를 대표한 만큼 뛰어난 솜씨의 대형 금동불이 있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절이었다는 뜻이다. 그 특별한 의미는 물론 이차돈의 순교일 것이다.

월성과 그 서쪽 형산강 사이 흥륜사를 찾아가는 길은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으면 좋다. 토착신앙의 성지인 만큼 울창한 숲이었을 주변은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1963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보호되고 있는 ‘경주 흥륜사터’에는 1980년대 같은 이름의 새절이 들어섰다. 여전히 규모 있는 절의 모습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경주박물관에 있는 이차돈의 순교비를 마당에 복원해 놓았다. 흥륜사의 법등(法燈)을 잇고 있는 것으로 자처하고 있다는 뜻이다. 순교비에 지붕돌을 씌워 놓은 것이 눈길을 끌지만 별다른 고증을 거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흥륜사터로 추정되는 곳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은 조금 혼란스럽다. ‘경주 흥륜사터’에서 북서쪽으로 800m쯤 떨어진 경주공고 자리다. 경주박물관은 2009년 이 학교 마당에서 나온 유물을 세척하다가 ‘흥’(興) 자가 새겨진 신라시대 수키와 조각을 확인한다. ‘사’(寺) 자만 남은 기와 조각도 출토됐다. ‘흥’(興) 자 위의 글자는 ‘ㅗ’ 모양만 남았지만 경주박물관은 ‘王’(왕) 자의 일부로 추정했다. 대왕흥륜사일 가능성은 높아졌다.

반면 ‘경주 흥륜사터’에서는 1976년 영묘사(令妙寺)라고 새겨진 기와조각 5점이 나왔다. 영묘사 역시 흥륜사와 더불어 칠처가람(七處伽藍)의 하나다. 철처가람은 신라가 불국토(佛國土)가 될 수밖에 없음을 상징하는 일곱 절을 뜻한다. 영묘사터 발견은 반가운 성과였지만 실제 흥륜사터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밝히는 것이 과제로 남았다.

이렇듯 두 곳의 흥륜사터를 찾아가는 것은 이차돈의 자취를 따라가는 것과 동시에 고고학과 발굴조사가 어떻게 잊힌 역사를 재구성하는 작업인지를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도 뜻깊다. 오늘 소개한 새로운 경주 여행 코스의 의미에 공감한다면 곧바로 실행에 옮길 것을 권한다. 청소년 자녀가 있는 가족이라면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오피니언타임스=서동철]

 서동철

 서울신문 논설위원

 문화재위원회 위원

 국립민속박물관 운영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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