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범의 동서남북]

“우리나라 권력 서열 1위는 최순실”, “청와대 문고리 3인방(이재만·정호성·안봉근)이 박근혜 대통령의 생 살이라면 최순실은 오장육부(五臟六腑)”라는 말이 나돌 때만 해도 그저 우스개려니 하고 흘려들었다. 하지만 24일 저녁 8시 JTBC에서 흘러나온 뉴스는 온 국민을 경악케 했다. 손석희 앵커는 흥분하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궁금한 것들을 차근차근 캐물었고, 기자의 답변은 충격에 충격의 연속이었다.

25일 JTBC 뉴스룸에서 최순실 의혹을 보도하고 있다. ©JTBC 방송 캡처

최순실, 박 대통령 연설문 수정한 것으로 확인돼

“최순실이 유일하게 잘 하는 게 대통령의 연설문을 수정하는 것”이라는 고영태 전 더블루K 대표이사의 발언이 나올 때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 무슨 해괴한 얘기인가? 아무런 공식 직함도 없는 최순실(60)이 무슨 자격으로 대통령 연설문에 손을 댄다는 것인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날 보도의 요지는 그동안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秘線) 실세로 알려진 최순실씨가 박 대통령의 연설문을 미리 전달받은 정황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설마’ 했던 일이 사실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최순실 게이트로 온 사회가 떠들썩하자 박 대통령은 25일 오후 전날 JTBC의 보도 내용을 시인하면서 대국민 사과를 했다. 야당에선 “일방적인 변명과 부실한 해명으로 일관했다”며 “청와대 비서진 전면교체와 내각 총사퇴”를 요구했다.

여당인 새누리당 의원들도 날선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비박계의 김용태 의원은 “여야가 특검 도입에 합의하면 공정하고 엄정한 수사를 위해 대통령이 당적정리 등 필요한 조치를 할 것으로 기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유승민 의원은 “국정조사든 특검이든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는 25일 기자회견문을 발표했다. “지금 국민의 분노가 치솟고 있다. 박 대통령도 당연히 수사 대상에 포함돼야 하고, 청와대 비서진 교체는 물론 내각은 총사퇴해야 한다. 오늘로서 대통령발 개헌 논의는 종료되었음을 선언한다. 정치권은 성난 민심을 수습하는 데 모든 힘을 모아야 한다. 이 나라는, 이 국가는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국민 모두의 것이다.”

대통령 연설문 등이 최순실 씨에게 전달, 수정돼 왔다는 주장에 대해 이원종 대통령 비서실장은 지난 21일 국회 운영위 국정감사에서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얘기”라며 이를 강력히 부인했다. 하지만 대통령 연설문은 비서실장조차 모르게 청와대 문고리 3인방에 의해 최순실 씨에게 지속적으로, 극비리에 전달돼 온 것으로 밝혀졌다.

보도에 따르면 최순실 씨는 박 대통령의 연설문 말고도 국무회의 발언 자료, 2012년 대선후보 당시 유세 연설문과 당선인 소감문, 청와대 비서진 교체 관련 인사정보 기록까지도 받아보았다. 이는 박 대통령이 자신의 연설문 수정작업 등을 적어도 지난 18대 대선부터 최 씨에게 전적으로 의존해 왔음을 보여준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6월13일 20대 국회 개원식에 참석해 연설을 마친 뒤 본청을 나서고 있다. ©포커스뉴스

‘드레스덴 선언’도 미리 받아 수정

24일 JTBC에 따르면 최순실씨 소유 PC에서 발견된 200여개의 문서파일 중에는 박 대통령의 연설문 등 공식발언과 관련된 파일 44개가 포함돼 있었다.

박 대통령은 2014년 1월 6일 신년 기자회견 자리에서 “저는 한마디로 ‘통일은 대박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통일대박’ 발언은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왔다. 하지만 통일에 대한 대통령의 발언으로는 신중치 못하다는 비판도 제기됐었다.

그런데 이날 JTBC 뉴스는 박 대통령이 2014년 3월 독일에서 대북 로드맵으로 발표한 ‘드레스덴 연설문’도 하루 전에 최순실 씨에게 전달됐다고 밝혔다. 독일 드레스덴 공과대학에서 발표한, 그래서 ‘드레스덴 선언’으로 잘 알려진 이날 연설은 한국시간 3월 28일 오후 6시40분에 실행됐는데, 이를 최씨가 받아 본 것은 정확히 하루 전인 3월 27일 오후 7시20분이었다고 뉴스는 전했다.

2014년 신년사에서 밝힌 ‘통일대박론’이 대북 로드맵의 큰 줄기라면 드레스덴 선언은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이었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이 이를 적극 지지하고 나서기도 했다. 그런데 최씨가 받아 본 드레스덴 연설문 파일 30곳에는 빨간 글씨가 섞여 있었고, 박 대통령이 실제 연설할 때는 20곳 정도가 바뀌어 있었다. 최씨가 수정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예컨대 “저는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3가지 원칙을 지켜나가고자 합니다”로 돼 있던 문장은 다음날 실제 연설 때는 “저는 이 자리에서 평화통일의 기반을 만들기 위해 북한 당국에 세 가지를 제안하고자 합니다”로 바뀌었다.

그런가 하면 처음 연설문에는 없던 내용이 추가된 사례도 나왔다. 박정희 대통령 재임 당시 ‘다닐 차도 없는데 무슨 고속도로냐’며 반대를 무릅쓰고 고속도로를 건설했다는 에피소드가 바로 그것이다.

최씨의 파일에 들어있는 2013년 신년사는 최종 수정된 지 4분 만에, 5·18 기념사는 한 시간 반 뒤에 최씨 손에 건네졌다고 뉴스는 전했다. JTBC는 “최씨가 수정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테지만 청와대 연설문 상당수가 최씨에게 사전에, 그것도 대체로 완성된 형태의 파일이 작성 직후에 전달됐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분석했다.

26일 이화여대 학생들이 비선실세 국정농단을 규탄하고 박 대통령의 사과를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박 대통령, 8·15 경축사에선 안중근 의사 숨진 곳을 하얼빈이라고 말해

박 대통령의 연설문은 그 전에도 몇 차례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었다. 최근 사례는 지난 8·15 광복절 경축사 해프닝이다. 박 대통령은 제71주년 광복절 축사를 하면서 “안중근 의사께서 차디찬 하얼빈 감옥에서…”라고 말해 네티즌들 사이에 대통령의 역사 상식이 도마에 올랐다.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곳은 하얼빈이고, 순국한 곳은 뤼순(旅順) 감옥이라는 사실은 초등학생도 아는 국민 상식이기 때문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잡음이 끊이지 않자 청와대는 이를 뒤늦게 정정하고 나섰다. 또 지난 7월 제10차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는 실패한 ‘쥐덫’ 사례를 성공사례로 잘못 설명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이 연설문들도 사전에 최순실 씨에게 전달돼 수정됐음은 물론이다.

박 대통령은 시정연설 다음날인 25일 오후 대국민 사과방송을 자청하고 나섰다. 이유야 어찌됐건 국민에게 죄송하게 됐다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 또한 진정성을 의심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최순실과 정유라 이야기가 넘쳐나고 있는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은 24일 제20대 국회 첫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느닷없이 개헌을 들고 나왔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이었다. “지금의 5년 단임제 헌법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이 됐다”며 “국민여망을 담은 개헌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국회도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구성해 개헌의 범위와 내용을 논의해 주기 바란다”고 요청했다.

박 대통령은 그동안 개헌문제가 나올 때마다 ‘정국을 집어 삼키는 블랙홀’이라며 적극 반대해 왔다. 그런 그가 이날 시정연설에서 적극적인 개헌 의사를 밝히자 국민들은 적잖이 당황스러운 표정이다. 상당수 지식인들은 박 대통령에게서 진정성을 느낄 수 없다고 말한다. 정국이 ‘최순실 게이트’라는 블랙홀에 빠져버리자 위기탈출을 위한 비상수단으로 개헌 카드를 들고 나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2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퇴진을 촉구하는 시민 사회 단체들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합동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포커스뉴스

위기 탈출용 개헌카드는 안 돼… 최순실 게이트 진상규명이 먼저

박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 마지막 해인 2007년 1월 대국민 특별담화 형식으로 제안한 ‘원포인트 개헌’에 대해 “참 나쁜 대통령”이라며 비판하고 나섰다. 유력 대선 주자였던 이명박 전 대통령도 “경제 살리기가 급한 시점에 개헌 문제로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며 적극 반대했다.

1987년 개정 이후 30년째 유지되고 있는 현행 헌법은 진작부터 시대적 소명을 다 했다는 평가가 나왔었다. 개헌을 찬성하는 의원이 200명을 넘어섰다. 여야를 막론하고 개헌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점차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개헌을 주장하는 박 대통령의 의지가 설득력을 얻으려면 무엇보다도 최순실 게이트 의혹을 말끔히 씻어내야 한다. 개헌에 앞서 최순실 특검이 먼저라는 얘기다. 박 대통령은 시정연설에서 개헌은 정부 주도로 추진될 것임을 강조했다. 이에 야당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어림없는 얘기라는 것이다.

1980년 이후 지금까지 사례를 보면 국민과 국회가 주도하는 개헌이 아니고는 성공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겨주고 있다. 박 대통령은 개헌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역할에 만족하고, 개헌에 필요한 구체적인 절차나 내용 등은 국회에 맡겨야 한다. 이 시점에서 박 대통령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난마처럼 얽힌 최순실 게이트 의혹을 풀기 위해 수사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탈당을 하고 안 하고는 새누리당 안에서의 문제일 뿐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는 큰 의미가 없다.

사태는 지금 걷잡을 수 없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최소한 특검 도입은 확실해 보인다. 이어 청와대 비서진 전면교체와 내각 총사퇴도 불가피해 보이지만 박 대통령이 사안의 위중함을 얼마나 체감하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국가적으로 더 큰 위기를 자초하지 말고 현 상황에서 최선의 해결책을 찾는 데 박 대통령이 적극 협조해야 한다. 그는 지금 역사의 피고인석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오피니언타임스=김준범]

 김준범

 (주)대한공론 상임 고문

 전 국방부 국방홍보원 원장

 전 중앙일보 정치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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