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문화로 만나는 세상]

글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어떤 해석이나 설명, 비평도 ‘팩트’ 자체를 능가할 수 없다. 누구는 그랬다. “누가 소설과 영화를 읽고 보겠느냐”고. 동의한다. 그 어떤 드라마도, 영화도 시들하다.

이번만큼은 ‘문화로 세상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영화와 소설을 만난다’고 해야 맞다. 영화나 소설의 상상을 초월하는 현실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그것도 대통령에게서.

27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앞에 최순실 의혹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포커스뉴스

드라마도 아닌 뉴스를, 저녁 8시에 시작하는 JTBC의 ‘뉴스룸’ 보려고 매일 기다리는 일도, 그 뉴스에서 대통령의 거짓말과 무능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일도 태어나서 처음이다. 이런 관심이, 반전이 흥미와 재미를 위한 드라마라면 좋으련만. 보면 볼수록, 확인하면 할수록 대한민국 국민으로 사는 것을 더욱 부끄럽고, 어이없고, 충격적으로 몰아가고 있으니. 그렇게 강조하던 대한민국의 품격, ‘헬조선’을 비하라고 몰아 부치던 대통령은 어디 갔나.

합리적 의심은 모두 사실이 됐다. 그 이상이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가능하다고, 상상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겼던 일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상상 초월의 현실이 드러날까. 소설과 영화로 치면 겨우 발단을 거쳐 전개에 들어선 정도인데. 그래서 이제는 ‘뉴스룸’의 보도가 슬슬 두렵다. 시작이 그랬듯이 이 현실의 결말 역시 어디로 갈지 걱정도 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와 소설도 모두 사실로만 채우지는 않는다. 역사를 소재로 한 사극도 마찬가지다. 사실과 사실 사이를 작가의 상상력이나 허구가 들어간다. 그렇다고 그것을 ‘가짜’라고 하지 않는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 재단이 도화선이 되어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최순실 게이트’도 군데군데 드러나지 않고, 밝혀지지 않은 ‘사실’ 대신 상상력을 집어넣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사실’을 알 수 없을 뿐더러, 필요하지도 않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들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미 그 자체로 소설과 영화의 상상력을 뛰어넘었으니까.

27일 서울 광화문광장 앞에서 청소년들이 거리로 나와 시국선언을 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소설 ‘최순실 게이트’는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전개해야 될까. 시기만 뒤로 돌리면 큰 고민이 없다. 여왕이 통치하는 왕조시대나 샤머니즘과 주술이 횡행하는 고대국가로. 그래야 리얼리티가 산다. 무속적인 한 여자가 여왕을 조종하고, 나라와 관직을 좌지우지하고, 문화 예술을 껍데기로 만들고, 딸을 위해 대학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일이 지금 이 땅에서 가능하다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그것만 바꾸면 나머지는 밝혀진 사실만 하나하나 잘 정리해도 흥미진진한 소설이 될 것이다. 신화에서처럼 주술적 요소도 있고, 마녀도 있고,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간신도 있고 내시도 있다. 이야기의 전개와 구성, 다양성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강력한 힘을 가진 마녀가 여왕의 사소한 일상은 물론 손을 뻗치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에.

자잘한 에피소드는 얼마든지 있다. 앞으로 밝혀질 곳곳의 그의 입김이 채워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뉴스’도 그것을 확인하러 갈 것이다. 그의 입김이 남긴 흔적, 단지 그 이유만으로 ‘완장’을 찬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맹목적인 등장인물들을 하나하나를 찾아갈 것이다. 이미 시작했다.

국민들은 이 소설이 주인공들만의 이야기로, 그것도 어느날 갑자기 천둥치듯이 끝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대하소설처럼 디테일을 살려 주변 인물들의 모습까지 빼놓지 않고 묘사하고 그들의 결말도 보고 싶어 할 것이다. 그것을 통해 ‘천망(天網)은 회회(恢恢)하지만 소이불루(疎而不漏)’란 진리를, 하늘의 그물은 천하의 권력자라고 해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할 것이다.

모든 신화와 설화가 그렇고, 소설과 드라마와 영화가 그렇듯 ‘최순실 게이트’도 권선징악이어야 한다. 어떤 작가도, 어떤 등장인물도 이를 배반해서는 안 된다. 그것만이 영화와 소설보다 더 기막히고 참담한 2016년 대한민국에서 사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나마 무너진 자존심을 일부라도 회복시키는 길이다.[오피니언타임스=이대현]

 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전 한국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저서 <소설 속 영화, 영화 속 소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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