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에서 쓰는 편지]

지난 5월 강원도 홍천군의 한 도로에서 확장 공사를 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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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는 요즘 ‘공사 중’입니다. 느닷없이 무슨 소리냐고요? 말 그대로입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준비하느라 곳곳에서 공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가장 활발한 게 도로공사입니다. 어느 길은 확장하느라 파헤쳐져 있고, 어느 구간은 직선화 공사를 하느라 분주합니다. 좁았던 길이 훤하게 넓어지고, 구불구불하던 길이 다림질한 듯 반듯하게 펴지니 상전벽해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즈넉한 길을 달리던 날이 은근히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저는 공사구간을 지날 때마다 생뚱맞게도 지난여름 끝머리에 함경북도를 강타한 수해가 그려집니다. 사진 몇 장 본 게 전부인데도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아주 연관이 없는 건 아닙니다. 2006년 여름이었던가요? 강원도 역시 폭우로 도로 곳곳이 대거 유실된 적이 있으니까요. 참혹할 정도였다고 기억합니다. 그때 복구현장을 직접 가봤기 때문에 ‘도로’나 ‘공사’라는 단어를 매개로 이미지가 연동되는 모양입니다.

북한 인터넷 선전매체 내나라가 지난 9월16일 공개한 홍수 피해 사진. ©내나라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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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초 북한 함경북도에 닥친 홍수는 사상 최악의 피해를 불러왔습니다. 138명이 사망하고 400여 명이 실종됐으며 2만 채의 가옥이 침수됐다고 합니다. 이재민은 무려 14만명에 이르고요.

직접적인 피해도 컸지만 후유증 역시 길고도 깊습니다. 유엔은 최근 함경북도에 설사병을 앓는 어린이가 크게 늘었다고 전했습니다. 영양실조에 걸린 어린이도 4배가량 증가했다고 합니다. 당국의 식량 배급에 의존하고 있지만, 하루 300g의 배급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또 수재민들이 파괴된 집이나 다른 사람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며, 극심하게 추운 겨울이 다가오기 전에 거처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북한 수해는 남쪽에서도 알게 모르게 논란이 됐습니다. 쟁점은 정부 차원의 지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수해를 입은 북한 주민에게 인도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곳곳에서 쏟아졌습니다. 남는 쌀을 보내자는 의견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원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더 컸습니다. 반대 측의 주장은 북한에 도움을 주면 주는 만큼 우리의 목숨을 겨누는 핵으로 돌아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부의 입장은 시종일관 반대 측과 함께 했습니다. 홍용표 통일부 장관은 얼마 전 “인도 지원 문제에 대한 정부 입장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는 입장이나, 5차 핵실험 이후 여러 상황이 엄중하고 특별하기 때문에 미국과 다른 상황에서 판단할 필요 있다고 본다”며 정부 방침에 변화가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10월17일 국회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한 정진석 원내대표가 송민순 전 장관의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를 들고 있다. ©포커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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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의 도로공사에서 출발한 생각은, ‘송민순 회고록’까지 이어집니다. ‘최순실’이라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바람에 잠잠해졌지만 대선 정국이 시작되면 다시 불거질 게 틀림없는 쟁점입니다. 새누리당은 “노무현 정부가 북한의 결재를 받아 유엔 북한인권 결의안을 기권했다”며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맹공을 퍼부었습니다. 특히 이정현 대표는 “사실상 북한과 내통한 것”이라고 문재인 전 대표를 비난했습니다.

새삼스럽게 ‘우병우’ ‘최순실’의 치부를 덮으려는 전략이었다든가, 속 보이는 ‘북풍’ 전략이라든가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공방을 지켜보는 내내 가시처럼 걸려 넘어가지 않는 건 ‘내통’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이정현 대표가 사전풀이까지 해줬지만 여전히 흔쾌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치부가 소위 ‘총풍’으로 상징되는 내통이라는 걸 알 텐데, 되레 공격의 칼날을 세우니 코미디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큰일 날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땐 내통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국민을 배신하는 내통이 아니라 소통을 전제로 한 내통 말입니다. 최소한의 대화 창구마저 끊어져버렸으니 북한의 수해 같은 건 먼 나라 이야기일 수밖에요. 북측의 잘못 때문이라고 탓만 하면 아무것도 이뤄질 수 없습니다.

9월18일 강원도 철원군 철원평야에서 농부 안영철씨가 올해 첫 가을걷이를 하고 있다. ©철원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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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회고록’이니 ‘내통’이니 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역시 수해 지원에 관한 것입니다. 이쯤에서 수해지역 주민들이 내년 봄까지 먹을 수 있는 쌀을 보내주겠다고 ‘통 큰’ 결단 한번 하면 어떨까요? 나라꼴이 이 지경인데 한가한 소리 한다고 핀잔이나 듣겠지만, 그럴수록 떠들 수밖에 없습니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릴 북한 주민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송민순 회고록’의 쟁점을 파고 들어가면 그 뿌리는 ‘북한의 인권’ 아닌가요? 북한 동포의 인권에 대해서는 그렇게 흥분하면서, 수해로 굶주리는 북한 주민을 끝내 외면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인권이 중요한 건 두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역시 살아있어야 누리는 거니까요.

남북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지금, 수해 지원은 냉각 관계를 풀어나가는 실마리가 될지도 모릅니다. 위정자들이 아집을 버리고 진정 평화를 추구한다면 말입니다. ‘내통’마저 아쉬워지는 이유입니다.[오피니언타임스=이호준]

 이호준

 시인·여행작가·에세이스트 

 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문명의 고향 티크리스 강을 걷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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