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건의 드라이펜]

지난 주말 필자가 회원으로 있는 한 모임에서 충북 음성과 보은으로 가을 소풍을 다녀왔다. 40년도 넘어 다시 찾은 보은의 속리산 법주사 말고는 모두 초행으로, 음성의 매괴성당과 철박물관, 보은의 삼년산성과 솔향공원, 청주의 고인쇄박물관과 흥덕사지 등을 둘러보며 충북이 숨겨진 문화재의 보고임을 새삼 알게 됐다.

이번 여행에서 필자가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또 하나의 초행지가 있었다. 음성의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생가마을이었다. 반 총장이 한국의 자랑인 터에 고향 사람들에겐 더욱 그럴 것이다. 그래서 충청북도를 비롯해 태어난 곳인 음성군과 자란 곳인 제천군 충주시 등이 경쟁적으로 ‘반 총장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리라.

반기문 평화랜드에 설치됐던 반기문 동상. 지난 7월 우상화 논란 끝에 철거됐다. ©포커스뉴스

사실 이런 종류의 사업은 자치단체장들에겐 선거용 전시행정으로도 안성맞춤이다. 더욱이 반 총장이 유력한 차기 대선후보로 거론되면서 과열상을 띠게 되었고, 반대 세력들은 생가마을이 반기문 우상화와 사전선거운동이라며 정치적 공격을 시작했다.

이런 국내 분위기가 외신에도 전해졌다. 지난 8월15일자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WP)에 반 총장 생가마을 르포 기사도 그중의 하나다. 반 총장 고향에서 반기문 찬양이 지나쳐 북한 김일성 3대의 우상화와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한 기사였다. 이 기사는 국내의 모든 언론이 인용 보도했고, 그 보도 후 생가 앞에 사진 촬영용으로 설치됐던 그의 동상이 철거됐다.

반기문 생가마을의 첫인상은 WP의 보도가 과장을 넘어 왜곡이라는 느낌이었다. 아담하다 못해 초라하게 느껴지는, 지난 6년간 6만 명, 하루 평균 300명 정도의 관광객이 찾은 이 생가마을에서 어떻게 북한의 우상화가 연상됐을까 의아했다.

반총장 생가마을은 청주와 음성을 잇는 36번국도 변의 음성군 원남면 행치길 17 행치고개마루 아래에 있었다. 뒤로는 해발 509m의 보덕산(普德山)이 있는 이곳은 광주 반씨 집성촌으로 현재도 15가구가 살고 있는 평범한 시골마을이다. 마을 사람들은 산의 이름처럼 ‘넓고 큰’ 사람을 낼 곳이라고 했으나 유엔사무총장을 냄으로써 산은 이미 이름값을 한 것 같았다.

생가마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생가, 평화랜드 공원, 기념관이었다. 반총장 취임 후 2007년부터 시작돼 2010년 준공됐다. 군비 도비 국비 등 총 28억원이 투입된 생가마을에서 3600평 규모의 평화랜드가 가장 크고 조성비가 많이 들었다.

평화랜드는 유엔 회원국 국기가 조각된 타원형 돌구조물과 기념탑이 전부다. 허술하고 주변 환경과 부조화한 느낌을 준다. 이곳에 세웠던 실물크기의 반기문 동상은 우상화 시비 끝에 지난 7월 생가 앞의 동상보다 먼저 철거됐다.

충북 음성군 원남면 반기문 UN사무총장 생가를 관광객들이 구경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생가는 토담으로 둘러싸인 방 두 칸의 12평짜리 초가집으로 원래 초가였다가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뀐 뒤 아예 헐렸던 것을 사진에 근거해 복원했다고 한다. 사랑채는 물론 헛간도 없는 빈한한 시골집 그대로다. 집터와 마당과 토담 밖의 잔디밭을 포함해도 100평이 안 돼 보였다.

생가 곁에 있는 반기문기념관은 건평 60평의 공간에다 반총장의 업적들을 빼곡하게 전시하고 있어 그 답답함으로 숨이 찰 지경이었다. 생가와 기념관 앞에는 웅덩이라고 할 만한 작은 연못이 있었다. 생가마을 초입에 버스 5대, 승용차 10여 대를 댈 수 있는 주차장이 설치된 것이 관광지 구실을 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하는 듯했다.

이런 구조물과 분위기의 생가마을을 놓고 우상화를 얘기하는 것이 겸연쩍었던지 반대자들은 죽어서나 세우는 동상을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 세우려한다고 공격해 생가마을의 두개의 동상을 철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동상 알레르기는 4·19 혁명 때 남산에 있던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끌어내려 끌고 다닌 역사의 잔재일 수 있다. 그것이 이승만 대통령이 타계한 지 50년이 넘었음에도 기념관은커녕 동상 하나 건립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생전에 자신의 동상을 하나도 만들지 않았던 박정희 대통령도 사후 40년이 다 되도록 비슷한 처지다.

음성군은 철거된 동상들을 보관 중이라고 했는데 내방객들이 같이 앉아 사진을 찍도록 설치했던 생가 앞의 좌상 동상과 의자만큼은 살려둘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어떤 기념관이던 설립대상자의 동상이 없이 지어지는 기념관은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은 모두 고향 등의 연고지에 기념관을 두고 재임 중의 기록들을 전시한다. 사후에 지은 경우도 있지만 최근의 대통령들은 모두 생전에 짓는다. 현 오바마 대통령은 퇴임도 하기 전에 5억 달러(5,700억원)를 들여 고향인 시카고에 기념관을 세우기 위해 설계자를 공모하고 있다.

이런 점에 비추어도 북한에 빗댄 반기문 우상화 주장은 터무니없다. 북한 전역에는 3만8000개의 김일성 동상이 세워져있고, 평양 만수대 언덕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거대한 김일성 김정일 부자 동상이 서 있다. 모든 사람들이 김일성 얼굴이 든 배지를 가슴에 달고 다니며, 집안에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얼굴 사진을 걸어놓게 하는 게 북한이다.

한국인 유엔사무총장은 국가 간, 대륙 간 역학관계로 볼 때 최소한 앞으로 100년 안에 다시 나오기 어려운 자리다. 그런 점에서도 반 총장의 존재는 대선 출마 여부를 떠나 특별하고, 기념관 역시 국가 위상에 어울리게 좀 더 체계적으로, 규모 있게 건립할 필요가 있다. 기초자치단체가 소꿉장난하듯이 할 일이 아니다.

생가의 추녀 밑에는 반 총장 내외와 충북 도지사 등 지역유지들이 생가 마루에 앉아서 찍은 사진이 당호(堂號)처럼 걸려 있었는데 생가마을 조성 의도가 선거용이 아니냐는 의심과 공격을 받기 딱 좋은 모습이었다.

기념관 건립 재원 마련도 국가예산이 아니라 외국에서처럼 후원회가 주관하는 형식이 바람직하다. 그것은 불필요한 논란으로 기념의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국가가 키워서 보유한 인적 자산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적 풍토다.[오피니언타임스=임종건]

 임종건

 한국일보 서울경제 기자 및 부장/서울경제 논설실장 및 사장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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