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옛 노래 가사를 음미하다보면 작품이 출현했던 당시의 공간배경과 현실의 빛깔이 적나라하게 다가와서 놀라운 감회에 젖을 때가 있습니다. 가요 ‘타국(他國)의 여인숙(旅人宿)’(박영호 작사, 문예부 편곡, 박향림, 신회춘, 남일연 노래, 콜럼비아 40822, 1938)의 경우가 바로 그러합니다. 이 노래가사에는 세 부류의 뜨내기가 험난했던 시절의 구체적 내용을 증언해주는 하나의 캐릭터로 등장합니다. 배경은 제목에서 밝히고 있는 바처럼 ‘타국’입니다. 이 타국은 필시 중국의 신경이나 길림, 봉천, 하얼빈, 치치하얼, 쟈무스, 목단강 등을 비롯한 남북만주 일대의 어느 후미진 숙박업소인 ‘여인숙’입니다.

‘여인숙’은 부유적 군상들이 모이는 곳

여인숙이 무엇이냐고요? 그렇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이런 낯선 용어에 대체로 익숙지 않을 것입니다. 보통 여관이란 말이 일반적일 텐데, 이것은 과거 한국의 흔한 숙박시설이었습니다. 조선시대까지는 나그네에게 밥과 술을 팔고 잠도 재워주던 주막(酒幕)이나 객주(客主)란 형태가 일반적이었지요. 거기서 조금 더 발전하여 일정한 숙박시설을 갖추고 그에 대한 비용을 받으며 나그네를 재워주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집이 여관입니다.

1960년대 이후로 여관은 차고가 별도로 있고 현대화된 시설을 갖춘 모텔 등의 숙박시설에 밀려 아예 없어지거나, 월세 등 장기 숙박자 전용으로 바뀐 경우가 많았습니다. 장기 숙박자들은 주로 건축 공사장을 전전해 다니며 힘겹게 일하는 노동자들이거나 제3세계 나라들에서 찾아와 노임을 벌려는 외국인노동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여관보다 한층 값이 싸고 규모가 작으며 낮은 등급의 숙박업소가 있는데 그게 바로 여인숙입니다. 이곳에서는 욕실이나 화장실 등을 공동으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니어판으로 막은 허술한 방벽의 윗부분에 구멍을 뚫어 하나의 희미한 형광등을 두 방이 함께 절반씩 나누어쓰도록 설치된 곳도 많았습니다. 근대문화의 잔재를 보여주는 전당포(典當鋪)를 찾아보기가 어려워진 것처럼 여인숙도 이젠 발견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이 여인숙에는 하루의 고단한 노동을 마치고 머리를 눕히러 들어오는 지친 노동자들이 곤하게 잠을 잡니다. 그들 중에는 어쩌다 하게 된 행상(行商), 혹은 사람이 모이는 버스주차장, 지하철, 공원 등지에서 허접한 물건 파는 일을 주로 하는 뜨내기 장사치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대개 정해진 곳이 없이 전국의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방랑자, 즉 부유적(浮游的) 군상들입니다. 다른 말로 유랑민(流浪民)이라 부르기도 하지요.

한국근대사에서 유랑민이 발생하게 된 이유는 부패한 봉건왕조의 붕괴 및 외세침략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19세기 중반 이후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 앞에서 조선은 근대국가건설을 위해 체제를 정비하고 일정한 개혁의지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갑신정변과 동학농민전쟁의 실패로 새로운 민주국가건설의 기회를 잃어버린 조선은 너무도 어이없이 일제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지요.

일제는 우선 조선의 경제독점과 착취를 위해서 1908년 8월, 조선실업인과 일본귀족들이 1000만 원의 자금을 들여 합작한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 이하 ‘동척(東拓)’으로 줄임)란 수상한 기관을 세웠습니다. 조선경제침탈의 첨병역할을 주도한 이 착취기관은 1912년 근대적 토지제도를 확립한다는 명분으로 토지조사국을 설치했고, 전국적인 토지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기한부 신고제처럼 한국인들에게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신고절차를 만들어 토지신고를 기피하거나 기회를 놓친 공공기관과 문중의 토지, 산림, 초원, 황무지 등 전 국토의 40%를 마치 청소기로 빨아들이는 듯이 마구잡이로 탈취했습니다. 이로 인해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넋이 나간 채 일본인의 소작농이나 유랑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지요.

일제의 토지조사로 농토 빼앗긴 농민들 유랑민으로 전락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빼앗은 땅을 동척과 일본 농업이민에게 헐값으로 불하했습니다. 동척은 막대한 토지를 조선인에게 경작시켜 고율의 소작료를 챙겼습니다. 이와 함께 영세농민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2할 이상의 높은 이자를 받는 방법으로 막대한 이득을 취했지요. 1910년대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완료하고 동척과 일본인 민간지주들의 농장체제를 굳힘으로써 조선의 수탈체제를 갖추었습니다. 이 과정이야말로 일제 식민통치의 침략적 의도와 경과 및 그 실체를 고스란히 알게 해주는 본질이라 하겠습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인 자작농(自作農)은 3%로 줄어들고 소작농(小作農)이 크게 늘어서 이 때문에 조선농민들은 급격히 몰락하게 됩니다. 특히 지주에게 유리한 기한부 계약은 소작농으로 전락한 농민들의 생계를 위협하여 경제적으로 일본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도록 했습니다. 게다가 영세농민들은 일본인들의 고리대(高利貸)에 의해 2중, 3중으로 희생되어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지요.

소작인들은 농장에 들어갈 때부터 이미 일본인지주에게 농량대(農糧貸), 비료대, 영농비, 종자대(種子貸), 농우(農牛) 사료대(飼料貸), 농우 연부(年賦) 등등의 각종 채무를 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인지주는 고리대업을 겸하고 있었으며 그 방식은 매우 가혹했습니다. 일제의 간교한 수탈로 희망을 잃은 조선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화전민(火田民)이 되거나 만주, 연해주 등지로 가족들과 바가지 달각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정처 없는 방랑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에게 두만강과 압록강은 눈물의 강으로 보이기도 했을 터이지요. 이상이 20세기 초반, 한반도에서 유랑민이 대량으로 발생하게 된 전체배경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1930년대 후반에 발표된 옛 가요 ‘타국의 여인숙’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삶과 그들의 내면세계로 한번 들어가 보기로 하지요.

부는 바람 우는 물새 모두 낯설어
때 묻은 베개 맡에 꿈은 바쁘다
너도 나도 나도 너도 흘러가는 몸
신세의 타령이나 하여 봅시다

요 내 몸은 흘러가는 참빗 장사요
고향은 전라도 땅 벌써 다섯 해
조실부모 어린 몸을 바람에 붙여
애송이 열여덟이 차마 가엾다

요 내 몸은 흘러가는 신약장사요
고향은 황해도 땅 벌써 일곱 해
돈 벌러 간 아들 찾아 이 땅에 왔소
을축년 동짓달에 이 땅에 왔소

요 내 몸은 흘러가는 물감 장사요
고향은 함경도 땅 벌써 여덟 해
시집가던 그 당년에 소박을 맞아
집 떠난 남편 찾아 헤매입니다

우습구려 우습구려 요 세상살이
울어도 인생이요 웃어도 인생
빈손으로 왔다 가는 뜬세상 살이
울기는 왜 우나요 웃고 삽시다
-가요 ‘타국의 여인숙’ 전문

뜨내기들의 슬픈 유랑 인생 3절 아닌 5절에 담아

보통 SP음반에 수록된 가요작품의 경우 3절이 기본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전체 5절로 구성된 것이 하나의 특징이네요. 모두 들어보니 만주의 어느 볼품없는 여인숙에서 날이 저물어 하루 일 마치고 돌아온 뜨내기들이 서로 자기소개 겸 인사조로 슬픈 삶의 역정을 낱낱이 고백하고 토로하는 스크린입니다. 느린 트로트풍의 가요로 5절 모두를 하나의 작은 음반에 담기는 무리였겠지요. 그래서인지 매우 빠른 곡조의 음률에 실어서 전체가사를 소화시키는 방식을 쓰고 있습니다. 4절까지는 중간에 간주(間奏) 없이 연속으로 가창이 되다가 5절을 앞두고는 처연한 분위기의 간주가 잠시 삽입됩니다.

이 노래의 원곡은 일본가요 ‘눈물의 세 나그네(淚の三人旅)’로 ‘타국의 여인숙’은 일종의 번안적(飜案的) 성격의 작품입니다. 일본의 유명시인 사이조 야소(西條八十) 작사의 노랫말에 에구치 요시(江口夜詩)가 작곡을 해서 1937년에 발표된 엔카였습니다. 이 곡을 바탕으로 극작가 출신의 작사가이자 태평레코드사 문예부장이었던 박영호(朴英鎬, 1911~1953)가 노랫말을 새로 번안해서 넣고 곡조를 다시 다듬어서 콜럼비아레코드사 문예부 편곡이라 표시했습니다. 일본가요의 가창(歌唱)에 참여한 가수는 오토마루(音丸), 기리시마 노보루(霧島昇), 후타바 아키코(二葉秋子) 등 3인 구성이었는데, 식민지조선의 가요에서도 박향림(朴響林, 1921~1946), 남일연(南一燕, 1911~?), 신회춘(申懷春, 생몰연대 미상) 등 셋입니다.

그러면 가사의 전문을 본격적으로 음미 분석해보기로 하지요. 1절은 세 가수가 처량하고 구슬픈 유랑민 음색의 합창으로 엮어갑니다. ‘부는 바람 우는 물새’는 타국의 낯선 풍경이기도 하지만 뜨내기로 살아가는 그들 자신의 직접적 표상이기도 합니다. ‘때 묻은 베개’란 대목에서 우리는 1930년대 백석(白石) 시인의 시 ‘산숙(山宿)’을 떠올리게 되고 그 유사성, 동일성을 보여주는 작가적 상상력에 몹시 놀랍니다. 길지 않은 시작품이니 여기에 옮겨서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인숙이라도 국수집이다
모밀가루 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웃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 하다
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나가 누어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木枕)들을 베여보며
이 산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들에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얼굴과 생업(生業)과 마음들을 생각해 본다
-백석의 시 ‘산숙’ 전문

가수 박향림과 백석 시인

이 작품은 국내의 산골을 어떤 일로 떠돌다가 국수 파는 주막집에 들어가 하룻밤을 지내는 떠돌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만주의 여인숙이나 식민지조선의 산골여인숙 풍경이 별반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게 되네요. 만주에서의 ‘때 묻은 베게’가, 식민지조선의 산골에서는 새카맣게 때 묻은 목침으로 등장합니다. 하여튼 침침한 등불이 바람에 일렁이는 여인숙 골방에 모인 세 사람은 각자 신세타령을 노래로 펼쳐갑니다.

2절은 참빗을 팔러 다니고 있는 한 소년의 신세타령으로 함경도 주을 출신의 여성가수 박향림이 또랑또랑한 창법으로 부르고 있네요. 전라도출신으로 올해 18세가 되는 소년은 잘 팔리지도 않는 참빗행상을 하며 겨우 연명해갑니다. 소년은 13세에 부모를 잃고 아무데도 의지할 곳 없는 처량한 고아신세로 고향인 전라도 땅을 무작정 떠났습니다. 소년의 앞에 펼쳐지는 시간은 모든 것이 시련과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청년기세대들에게 참빗이란 역시 낯설고 기이한 물건이겠지요? 참빗은 빗살이 굵고 성근 얼레빗으로 모발을 대강 정리한 뒤 머리카락을 보다 가지런히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생활도구입니다. 이 참빗은 머리카락에 낀 때와 비듬, 서캐 등 각종 불순물을 훑어내기 위한 도구로 쓰이기도 했지요. 대개 대나무로 빗살을 촘촘히 박아 만들었지만, 고급형 참빗으로는 거북의 등껍질인 대모(玳瑁)로 만든 것도 있었습니다. 예전 부잣집 멋쟁이들이 품에 지니고 다니는 필수품이기도 했지요. 직사각형으로 만들어진 참빗의 빗살은 성긴 것과 촘촘한 것 등으로 필요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었습니다.

3절은 고향이 황해도인 떠돌이 신약장사의 푸념입니다. 이 노래는 1930년대 후반의 남성가수 신회춘이 구성진 목소리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황해도출신 떠돌이에게는 뚜렷한 목적이 있으니 그것은 집나간 아들을 찾는 일입니다. 극빈의 가정이 싫었던 아들은 어느 날 돈 벌어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무작정 가출해버렸는데, 행방이 묘연한 아들을 찾으러 아비는 을축년 동짓달(1925년 11월)에 바람찬 만주 땅으로 왔습니다. 애타게 표랑해 다닌 지 벌써 13년 세월이 덧없이 흘렀네요. 말로는 신약장사라 하지만 신약에 대한 전문지식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저 어깨 너머로 전해들은 얄팍한 지식으로 신약을 팔러 다니는데 성과가 그리 좋을 리 없습니다. 신약(新藥)이란 말은 한약(漢藥)에 대립적으로 생겨난 용어로 서양의술에 의해 제조된 약을 일컫습니다.

작사가이자 태평레코드사 문예부장이었던 박영호. ©한국유성기음악아카이브연구소 제공

4절은 물감장사 아낙네의 슬픈 내력입니다. 이 노래의 음색은 가수 남일연이 처연한 음색과 창법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작중화자는 함경도출신의 여인으로 1917년 혼인했지만 모진 시부모 등살에 기어이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예전에는 ‘소박맞았다’란 말로 썼습니다. 시댁에서 쫓겨난 여인을 ‘소박 댁’이라고도 불렀고, 신분상으로 하나의 흉(凶)이 되기도 했지요. 1930년대까지만 해도 농촌의 대가족제도 하에서 혼인과 관련된 이런 모순과 부조리의 굴레는 참으로 많고도 많았을 것입니다. 표독한 시어머니 밑에서 된 시집살이를 겪은 며느리들의 삶은 온통 눈물과 한숨뿐이었겠지요. 부모의 냉혹한 조치에 불만을 갖게 된 남편도 곧 가출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이날까지 종적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젊은 아낙네는 혹시라도 만주로 가면 남편을 찾을 수 있을까라는 일념으로 물감장사 행상을 합니다. 물감장사는 그녀에게 있어서 생계의 보조수단일 뿐 목적은 오로지 남편을 찾아서 다시 예전처럼 따뜻한 보금자리를 회복하는 일뿐입니다. 여기서 여인이 팔러 다니는 물감이란 그림의 재료보다는 옷감으로 쓰는 천에 각종 빛깔의 물을 염색하는 싸구려 염료(染料)였을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늘 필요한 것이 아니어서 그리 잘 팔리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5절 가사는 참 눈물겹고도 아름답습니다. 서로의 가련한 처지를 연민으로 감싸주며 낙관적 자세로 꿋꿋하게 살아가기를 상호 권유하는 아름다운 장면이 펼쳐지는데요. 이 노래의 결말이자 대단원(大團圓)의 의미를 지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참빗장사로 살아가는 전라도출신의 소년, 아들을 찾으러 다니는 황해도출신의 돌팔이 신약장사, 남편을 찾아다니는 함경도출신의 물감장사 아낙네. 이 셋이 여인숙의 침침한 골방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말고 힘든 시절 꿋꿋하게 살아가자며 서로에게 용기를 주고 부추기는 따뜻한 힘이 몸으로 전해져 옵니다.

'타국의 여인숙' 가사지 ©이동순

3절의 을축년은 대홍수가 휘몰아친 1925년… 시대 배경과 현실 담아

끝으로 이 노래 3절에 나오는 을축년이 지닌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 다시금 음미해보고자 합니다. 을축년은 1925년입니다. 이 해에는 무려 네 번이나 겹쳐서 휘몰아온 대홍수가 있었는데, 7월7일, 14일, 18일 등 7월 한 달에만 세 차례의 물난리가 있었습니다. 약 300∼500㎜의 집중호우가 쏟아졌고, 한반도 전역은 강물이 범람해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같은 해 8월에는 두 차례나 폭우가 쏟아져서 이미 혹독하게 수해 입은 지역을 또다시 재기불능의 상태로 휘몰아 넣었습니다. 도합 4회에 걸친 집중호우로 전국에서 사망자 647명, 가옥유실 6.363호, 가옥붕괴 1만 7.045호, 가옥침수 4만 6.813호의 피해가 발생했지요. 뿐만 아니라 논 3만 2.183단보, 밭 6만 7.554단보 등이 유실되어 피해액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져만 갔습니다. 그 피해액은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약 58%에 해당하는 엄청난 것이었다고 합니다. 을축년 대홍수는 한반도전역에서 발생한 사상최고의 무참한 대홍수로 기록되었습니다. 지금도 나이 많은 어른들 중에는 “아이구 을축년 대홍수 말도 말아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분들을 가끔 만날 수 있습니다.

가뜩이나 제국주의 식민통치자들의 수탈과 착취에 시달려온 한국인들에게 을축년 대홍수가 휘몰아쳤던 파괴와 참상은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요? 집중호우와 대홍수는 당시 한국인들로 하여금 옥상옥(屋上屋), 설상가상(雪上加霜)의 이중적 고통을 겪게 하였고 이 시련과 고통은 식민통치체제가 끝나기까지 혹독한 후유증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던 것이지요. 유랑민 대량발생의 배경이 바로 을축년 대홍수와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1938년에 발표된 번안가요 ‘타국의 여인숙’이 지닌 대중문화사적 진정성은 바로 이러한 시대배경과 현실의 구체성을 너무도 실감나게 잘 그려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엔 극작가의 오랜 경험을 가진 작사가 박영호(朴英鎬)의 탁월한 작품구성과 능력이 집중적으로 투영되었을 것입니다. 이 노래는 마치 한 편의 단막극(單幕劇)을 보듯 스크린이 자연스럽게 낡은 여인숙을 공간무대로 설정해서 카메라의 앵글이 이동해갑니다. 세 사람의 독특한 캐릭터를 지닌 배우들이 1930년대 후반, 만주라는 타국의 여인숙에 등장하여 식민지적 근대의 삶과 아픔, 그리고 시련의 사연들을 낱낱이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오피니언타임스=이동순]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   

  계명문화대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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