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웅의 촌철살인]

박근혜 대통령의 현재 심기는 어떤 것일까. 며칠 전 한광옥 비서실장이 “상당히 침울한 상태”라고 전했지만, 그건 그 나름 ‘심기 경호’ 차원의 얘기였으리라. 그 전에 읽은 한 칼럼은 박 대통령을 어려서부터 지켜봤다는 원로 정치인의 말을 빌려 이런 관측을 내놓았다. “국민 앞에서는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지만 그냥 있지 않을 거다. 골방에 들어가 혼자 울면서 보복을 다짐하고 있을 거다.”

8일 박근혜 대통령이 정세균 국회의장과 ‘최순실 정국’ 해법을 논의하기 위해 국회 본관에 들어선 가운데 야당의원들이 ‘박근혜 대통령 하야’라고 적힌 손피켓을 들고 있다. ©포커스뉴스

그 뒤로 진행된 일들을 보면 이 원로 정치인이 상당히 잘 본 것 같다. 박 대통령은 지난 8일 국회의장을 전격 방문해 “여야 합의로 추천한 분을 총리로 임명해 실질적으로 내각을 통할하도록 하겠다”면서도 2선 후퇴는 언급하지 않았다. 앞서 두 차례 대국민 사과를 했지만, 국민의 눈높이에 전혀 미치지 않았다. 많은 국민이 요구하는 하야·퇴진은 말할 것도 없고, 2선 후퇴도 그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같다.

이것이 사상 초유의 비선 실세 국정농단 사태를 저지른 장본인의 모습이다. 궁금해지는 건 좀 더 본질적인 문제, 즉 그가 무슨 생각을 갖고 정치를 하는 것일까이다. 만약 그런 게 있기나 하다면, 정치인으로서 그의 철학과 인생관은 무엇일까. 이 궁금증에 대해선 일찍이 시사평론가 김어준이 촌철살인 정리를 한 바 있다. “그 사람들(친박연대) 모아놓고 박근혜의 철학이 뭔지 구체적으로 쓰라고 시험 쳐봐. 전원이 한 페이지도 못 넘긴다. 쓸 게 없어. 국민과의 약속은 지켜야 하며, 국가는 번영해야 하고, 외세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 딱 세 줄 쓰면 끝이야.” 사람들은 박근혜를 긴 세월 알고 살아왔지만 그가 정작 어떤 정치인인지는 아는 게 없었다. 인지도가 사실상 100%인 현역 정치인이 이렇다는 건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의 정치철학이나 논리는 상당 부분 미지의 영역이었다.

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이 ‘미지의 영역’에 대한 궁금증이 많이 풀렸다. 박 대통령이, 이미 오래 전부터 최태민 목사와 딸 최순실의 꼭두각시나 아바타 같은 존재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것은 그가 실존적 인간으로서, 그리고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주체적 존재가 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그가 장관들의 대면보고도 받지 않고 최순실 등 비선조직에만 의존해온 까닭도 드러났다. 한마디로 그럴 깜냥이 아니었던 거다.

하늘이 공평하다 해야 할까. 그런 역량은 주지 않은 대신 권력에 대한 뜨거운 의지를 내렸다. 이것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일 것이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큰 영향을 입었음을 스스로 여러 차례 밝혀왔다. 대통령 후보 시절 정치철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다. “역시 저희 아버지라고 생각하게 돼요. …결단을 내릴 때 고뇌하는 모습, 아버지가 가진 역사관, 안보관, 세계관 이런 것이 말씀 중에 나오니까 들으면서 배웠습니다.” 다른 자리에선 “정치인이 된 지금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가 아니라 선배이자 스승이며 나침반과 같은 존재”라고 했다.

지난 3월14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선거, 민주주의를 키우다’ 특별전시회에서 관람객이 박정희 대통령 선거 포스터를 보고 있다. ©포커스뉴스

박 전 대통령과 그는 생물학적 부녀관계를 넘어 정치·사상적 사제관계다. 정권의 명운이라도 걸린 듯 숨 가쁘게 추진한 역사 교과서 국정화도 열쇠는 아버지였다. 나는 박 대통령이 지난 대선 때 들고 나와 재미를 본 경제민주화 공약을 당선 뒤 싹 뭉개버리는 것을 보며 ‘그 스승에 그 제자’임을 통감했다. 박정희는 유신의 명분으로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대사기극을 벌였던 것이다.

박정희는 사상적으로도 일관성이 없었다. 일제 말에는 혈서 맹세까지 하며 관동군 중위가 된다. 해방 뒤에는 남로당에 가입해 활동하다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그 좌경화조차 정치적 신념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기회주의적인 것이었다”고 국내 유일의 ‘박정희 평전’을 쓴 전인권 교수는 진단했다. 쿠데타로 집권해 3선 개헌, 10월 유신을 통해 영구집권을 꾀하다 암살당했다. 그를 평생 이끈 것은 국가·민족이란 대의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 권력 확대를 위해 얼마든지 변신할 수 있는 처세의 달인이었다.

지지율 5%인 대통령과 그 친부 대통령의 인생관을 살펴보는 데는 이유가 있다. 현 대통령이 스스로 권력욕을 꺾고 고분고분 물러날 가능성은 0%라고 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남긴 나쁜 유산 탓이다. 그는 오늘도 골방에서 막판 뒤집기에 골몰할 것이다. 자기 인생관과 철학은 없을지언정 권모술수의 능력만큼은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그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오피니언타임스=김철웅]

   김철웅

    전 경향신문 논설실장, 국제부장, 모스크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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