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혜탁의 대중가요 독해영역➁] 이설아 <엄마로 산다는 것은>

“늦은 밤 선잠에서 깨어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부스스한 얼굴
아들, 밥은 먹었느냐

피곤하니 쉬어야겠다며
짜증 섞인 말투로
방문 휙 닫고 나면
들고 오는 과일 한 접시”
이설아 <엄마로 산다는 것은>

이설아의 노래를 처음 들었던 것은 2014년이었습니다. 요맘때가 아니었나 싶기도 한데, 지금보다 조금 더 추웠던, 가을보다는 겨울에 가까운 어느 날이었습니다.

당시 소녀 같은 앳된 외모로 덤덤히 부르던 <엄마로 산다는 것은>의 울림은 생각보다 훨씬 깊었습니다.

퍽이나 자주 “피곤하니 쉬어야겠다며 짜증 섞인 말투로 방문 획 닫”곤 했던 못난 아들이라서 그런지, “늦은 밤 선잠에서 깨어” 밤 11시, 12시에 “아들, 밥은 먹었느냐”고 물으시던 어머니가 생각나서 그런지 이 노래를 들으면서 창피하게도 자꾸 고개가 숙여지곤 했습니다.

제목도 참 좋았습니다. ‘어머니로 산다는 것은’이 아니라 ‘엄마로 산다는 것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설아의 나이를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확실한 건 그녀에게는 ‘어머니’보다는 ‘엄마’라는 호칭이 더 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픽사베이

저를 포함한 제 주위의 많은 철부지 친구들도 엄마라는 호칭을 훨씬 더 자주 쓰곤 합니다. 다른 어른들 앞에서 3인칭으로 어머니를 가리킬 때나, 회사에서 전화를 할 때, 아니면 문어체로 표현을 할 때 정도를 제외하고는 늘 ‘엄마’입니다.

특히, 발화의 언어로서 ‘어머니’의 사용 횟수는 인생을 통틀어 몇 번 안 될 듯합니다. 문장은 분명히 존댓말로 끝나는데, 호칭은 ‘엄마’로 시작하는 이 재미난 문법현상은 사실 꽤나 많은 이들이 공유하고 있을 겁니다. 가령, “엄마, 저 오늘 좀 늦어요.”처럼 말입니다.

짜증내며 문 닫고 자기 방에 들어가 버리는 놈이 뭐가 예쁘다고 ‘과일 한 접시’를 가져다 주시는지, 엄마라는 존재는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저는 서석화 시인의 글이 한 편 떠올랐습니다. 서석화 시인을 비롯해 박완서, 안도현, 김용택 등 작가 20명의 성찰을 담은 《반성》이라는 책에 수록된 <어머니의 문안 전화>라는 글입니다.

오전 10시만 되면 작가의 어머니는 딸에게 전화를 겁니다. 딸의 목소리, 건강, 기분 등을 체크하고 딸과 짧게나마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매일 거는 어머니의 전화를 작가는 ‘문안 전화’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합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어머니의 아침 전화를 받을 때면 발신자와 수신자가 바뀐 것 같은 송구함에 마음이 쓰리다.”
서석화 <어머니의 문안 전화>

서 시인은 “어머니가 물으시는 말이 실은 내가 어머니께 여쭤야 될 말”인데, 생각과 달리 “어머니보다 한 발 앞서 문안 전화조차 드리지 못한 채 아침이면 늘 어머니의 전화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설아의 노래에서도 늦게 들어온 자식에게 밥을 먹었는지를 묻는 건 어머니입니다. 우리가 “어머니께 여쭤야 될 말”인데도 말입니다.

서석화 시인은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안동으로 급히 내려갑니다. 병원에서 어머니의 핸드폰을 열어본 그녀는 그 자리에서 와르르 주저앉습니다. 무심코 통화버튼을 눌렀는데 온통 자신의 이름뿐인 통화내역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사람의 이름으로 수신자, 발신자가 뒤엉켜 혼재되어 있는 자신의 핸드폰과 달리 어머니의 핸드폰은 열흘 전에도, 그 전에도 딸의 이름으로만 발신되었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가난한 시간”이라는 서 시인의 표현이 가슴을 세게 때립니다.

©픽사베이

이설아는 2013년 제24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 최연소로 금상을 수상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엄마로 산다는 것은>을 끝까지 듣다 보면, 요즘 많이 들을 수 있는 그 흔한 고음 한번 듣기 힘듭니다. 화려한 기교, 애드리브 등도 일절 없습니다.

그런데도 잔잔한 건반 연주와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에 몰입이 되고, 가사의 단어 하나하나에 감동을 받게 됩니다. 이런 그녀만의 전달력과 진정성으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큰 상을 받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을 해봅니다.

이 노래가 전파를 탈 때 가장 다행스러웠던 것은 제 옆에 엄마가 앉아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같이 들으면 괜히 쑥스러우니까요.

이 노래는 아래와 같이 끝을 맺습니다.

“그 모든 걸 다 버리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
엄마,
엄마로 산다는 것은
아프지 말거라, 그거면 됐다”
이설아 <엄마로 산다는 것은>

“아프지 말거라, 그거면 됐다”
아마 세상에서 우리에게 바라는 게 가장 적은 존재가 엄마일 겁니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사회에서, 다양한 인간관계망 속에서 얼마나 우리에게 요구하는 게 많습니까? 그런데, 아프지만 않으면 됐다고 하는 우리 어머니들.

<딸로 산다는 것은>, <아들로 산다는 것은>과 같은 노래가 있기나 할까요? 있다고 해도 이설아의 노래만큼 진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조금 더 사랑하는 사람이 말을 많이 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궁금한 게 많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더 애틋한 사람이 걱정도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어머니와 통화를 하다 보면 늙고 병든 어머니가 말도 더 많이 하시고 궁금한 것도 더 많으시며 내 걱정도 더 많이 하신다. 나는 그저 예, 예, 하다가 기껏 통화를 마무리하기 위해 한다는 말이 건강 조심하시라는 뜬구름 같은 소리만 할 뿐이다.”
서석화 <어머니의 문안 전화>

“조금 더 사랑하는 사람”,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 “더 애틋한 사람”인 우리 어머니(혹은 우리 엄마)에게 오늘만은 먼저 전화를 걸어보면 어떨까요? 문안 전화는 원래 자식이 하는 거니까요. [오피니언타임스=석혜탁]

 석혜탁

 대학 졸업 후 방송사에 기자로 합격. 지금은 모 기업에서 직장인의 삶을 영위. 
 대학 연극부 시절의 대사를 아직도 온존히 기억하는 (‘마음만큼은’) 낭만주의자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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