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 위에서 쓰는 편지]

먼저 사죄부터 드리겠습니다. 그날 광화문 광장에서 어른을 뵈었을 때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거든요. 더 솔직하게 말씀 드리면 “가스통은 어쩌고 여기로 나오셨지?” 이런 발칙한 생각까지 했습니다. 제 가벼운 성정 탓입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다시 뵈면 막걸리 한 잔이라도 올리고 싶습니다.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가 따로 있을 수 없는, 국민만 존재하는 그 자리에서 어찌 그런 막돼먹은 생각을 했는지, 발등을 찍고 싶습니다.

©이호준

어려운 시절을 건너온 제 아버지 세대들이 그렇듯, 어른의 얼굴에도 거친 세월이 깊은 고랑으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걸음마다 땀과 눈물이 흐르던 고랑이지요. 염색이 잘 된 덕인지 뒷모습은 50대쯤으로 보이시더니, 앞에서 뵈니 80대쯤으로 보이던 노인. 어른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뒷짐 진 손에는 어디서 받아오셨는지 ‘#새누리당도 공범이다’라는 전단을 들고 계셨지요. 젊은이들처럼 손에 쥐고 흔들지도 못하고, 차마 버릴 수도 없는 전단지 한 장이 저 혼자 바람에 펄럭거렸습니다.

연단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얼굴에는 고뇌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철석같이 믿었던 ‘우리 대통령’. 민족을 가난으로부터 구제했던 큰 대통령의 딸. 그가 나라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망가뜨린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혼돈스런 모습이었습니다. 하루아침에 등을 돌리기에는 너무 오랫동안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광장에 나가서 직접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하셨겠지요. 얼마 전까지 종편에서 손가락질 하던 ‘빨갱이’들은 대체 이 사태에 대해 뭐라고 떠드는지. 수틀리면 욕이라도 한 마디 해줄까 생각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연설을 들어보니 그른 말은 하나도 없고, 참 답답한 노릇이었을 겁니다.

어르신은 결국 시멘트 턱에 주저앉으셨습니다. 앉자마자 긴 한숨을 쉬시더군요. 그러면서 신음처럼 한 마디 뱉었습니다.

“휴우~ 박근혜가 퇴진하긴 해야 할 모양이여.”

마침 옆에서 아기를 어르던 젊은 엄마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습니다. 환한 표정이었습니다. 노인과 젊은 아낙과 어린아이가 한 자리에서 한 마음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날은 학생이나 아이들도 많았지만 어른들도 많이 나와 계셨습니다. 어느 해인가 청계광장에서 농성을 할 때 건너편 동화면세점 앞에서 꽹과리를 치며 방해하던 어른들은 한 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어른은 힘차게 “박근혜 퇴진!!!” 구호를 외치기도 하셨습니다. 한데, 그런 어른들을 보면서 기쁘지만은 않았습니다. 겨울 날씨에 노인들까지 불러낸 이 정권이 정말 미웠습니다. 얼마나 잘못했으면 겨울광장으로 수십만 명씩 불러내는 건지.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왜 물러날 생각을 안 하는 건지.

하지만 저는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우리 어른들이야말로 얼마나 현명한 분들이신지. 결정적인 순간에 이렇게 힘을 보태주시는구나 싶어,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어른들만큼 나라 걱정을 하시는 국민이 있으려고요. 험한 세월을 저어오면서 이 나라를 지킨 분들이 아닙니까? 전쟁 뒤 폐허에 다시 꽃을 피운 분들 아닙니까? 그러느라 손끝이 뭉툭해지고 허리가 휜 분들 아닙니까? 먼 나라의 노인이 아니라, 집에 가면 만나는 우리의 형님이고 아버지입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어른들이 살아계실 때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열두 번도 더 했습니다. 저야 이름 없는 장삼이사에 불과하지만, 아주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다고 거듭 결심했습니다.

어르신! 또 광장에서 뵙겠습니다. 그날은 좀 쓸쓸해 보이셨는데 친구들하고 같이 나오세요. 너무 추우면 나오지 마시고요. 이번엔 함께 함성이라도 외쳐보면 어떨까요. 제가 선창하겠습니다.[오피니언타임스=이호준]

 이호준

 시인·여행작가·에세이스트 

 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문명의 고향 티크리스 강을 걷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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