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범의 동서남북]

최순실 게이트가 구체적인 물증과 함께 일반에 공개된 것은 10월 24일 JTBC 뉴스룸 보도가 처음이다. 종합편성(종편) 채널인 JTBC는 그날의 보도로 세계적이고 세기적(世紀的)인 특종(特種)을 낚았다. 언론에서 통상 특종이라고 공인을 받으려면 최소한 4개 이상의 동종 매체가 그 기사를 받아줘야 성립된다.

10월 24일 JTBC 뉴스룸에서 ‘최순실 연설문’ 의혹을 보도하고 있다. ©JTBC 방송 캡처

JTBC의 세기적 특종 등 언론의 보도로 ‘최순실 게이트’ 쾌거 일궈냈지만

그런데 그날 JTBC 보도는 신문·방송·인터넷·통신 등 국내 모든 매체가 예외 없이 그 기사를 받아줬다. 외국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 국민은 물론 세계를 경악케 한 메가톤급 뉴스였기 때문이다. 금상첨화로 박근혜 대통령이 그 다음날(25일) 전례 없이 신속하게 사실을 인정하고 국민에 고개 숙여 사과까지 했다.

언론에 ‘최순실’이라는 이름 석 자가 정식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지난 9월 20일 한겨레 신문이 “미르재단과 K-스포츠 재단의 모금과정에 최순실 씨가 관여했다”고 보도하면서다. 이보다 앞선 7월 26일과 8월 2일에는 TV조선이 미르 재단과 K-스포츠 재단의 실체를 처음으로 밝혀냈고, 모금과정에 청와대 개입 사실을 폭로했다.

굳이 앞뒤를 가리자면 TV조선이 먼저 미르· K스포츠 재단의 존재와 청와대 개입사실을 최초로 밝혀냈고, 뒤를 이어 한겨레가 최순실의 역할을 추가로 밝혀낸 것이다. 두 매체의 퍼즐을 맞춰보면 두 재단 설립에 청와대가 깊숙이 관여했고, 재단설립의 실무자는 최순실이라는 결론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두 매체가 각고의 노력 끝에 건져 올린 단독보도는 특종기사로 대접받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다른 매체들이 그 기사를 제대로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모든 언론 매체들은 특별취재팀을 만들어 24시간 최순실 후속취재에 돌입했다.

그러던 중 JTBC가 문제의 최순실 태블릿 PC를 입수, 폭로하자 TV조선도 오랫동안 취재파일에 담아 두었던 정보들을 하나씩 꺼내 보도하기 시작했다. 지하 주차장에서 만난 최순실의 모습은 TV조선이 1년여 취재 끝에 방영한 것이다. 그런데 다른 매체가 별로 받아주지 않자 TV조선은 나름대로 시간조절을 하며 타사의 취재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중 JTBC의 뉴스 폭탄을 맞은 것이다. 취재는 타사보다 훨씬 먼저 시작했으나 특종은 엉뚱한 매체에 빼앗기고 만 셈이었다.

최순실 게이트라는 희대의 권력형 사기사건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은 JTBC를 비롯한 국내 여러 매체들의 끈질긴 추적보도가 이뤄낸 쾌거임이 분명하다. 언론의 집요한 진실추구 정신이 없었다면 최 씨와 그 일당,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은 임기 내내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우리 언론이 보여준 자세는 역사와 국민으로부터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1일 국회에서 뉴욕타임스에 실린 박근혜 대통령 풍자 만평을 공개하고 있다. 2014년 4월 안 의원은 대정부 질문을 통해 ‘정유라 승마 의혹’과 최순실을 처음 거론했으나 언론은 악의 고리를 파헤치지 않았다. ©포커스뉴스

언론의 대응은 뒷북…만시지탄 책임 면할 수 없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순실 사태에 관한 우리 언론의 대응은 만시지탄일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최순실이라는 이름은 세계일보가 2014년 11월 28일 ‘정윤회 문건 유출사건’을 폭로한 시간보다 무려 7개월이나 앞서 언론에 등장했다.

그해 4월 8일 더불어민주당의 안민석(50, 경기오산) 의원은 대정부 질문을 통해 ‘정유라의 승마 의혹’을 폭로하면서 최순실을 처음 거론했다. 서울대 체육과를 졸업하고 중앙대 교수를 지낸 그는 체육계와 인연이 깊고 국회에서도 체육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유라라는 한 승마선수의 비리를 캐다보니 상상도 못한 거악(巨惡)과 마주하게 됐다”(중앙선데이 2016.11.20.)고 말했다. 이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본질은 국가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은 가족 사기단 사건”이며 “박근혜 대통령 없이는 이 게이트 자체가 (성립) 불가능하다”고 규정했다.

언론은 이때부터 최순실-정유라-박근혜로 이어지는 악의 고리를 면밀히 추적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었고, 따라서 그 뒤를 캐는 치밀함이 요구된 시기였다. 2016년 7월의 TV조선이나 9월의 한겨레 보도도 안 의원의 대정부 질문이 나온 지 2년이 지난 뒷북 때리기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책임 소재를 따지기로 하면 단연 새누리당과 청와대, 국정원과 검찰 등을 꼽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중차대한 책임 대열에서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집단이 바로 언론이라는 게 국민의 지배적인 여론이다.

새누리당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맹목적인 충성만 과시해 왔고, 주류 언론 역시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데만 충실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개인이나 그 정책에 대해 건전한 비판이나 합리적인 의심을 가지면 마치 불경죄라도 되는 양 언론 자체 검열에서 정리되기 일쑤였다.

특히 국내 보수 언론들은 박근혜 정부출범 이후 비정상(Abnormal)이 정상(Normal)을 지배하는 전도된 상황이 장기간 유지되고 있음에도 그것을 과감히 경고하거나 정면으로 비판하지 못했다. 역대 어느 대통령도 언론으로부터 그런 관용과 배려를 받아본 적이 없을 정도였고, 그런 만큼 언론 고유의 비판기능은 마비돼 왔다.

1974년 8월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어머니를, 그 5년 뒤 10·26 때는 아버지를 잃은 박 대통령은 1998년 정계에 입문할 때까지 거의 세인들의 기억에서 지워지다시피 했다. 그녀에게 10·26 이후 18년간은 암흑의 시기였다. 그 후 국회 5선 의원을 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2011년 12월 TV조선 개국 당시 ‘시사토크 판’. 당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의 인터뷰를 진행하며 ‘형광등 100개의 아우라’라는 자막을 내보내고 있다. ©TV조선 방송 캡처

최태민 관련은 물론 박 대통령의 청와대 생활도 적극 보도하지 않아

그녀는 육 여사 서거 후 사이비 목사 최태민과 급속히 가까워 졌고, 그런 박 의원에 대해 언론은 적극적인 취재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 과정은 물론 2012년 정식 대선후보가 된 이후에도 과거 무성했던 최태민과의 관련 의혹을 작심하고 추적, 보도하려는 언론은 거의 없었다. 설득력 없는 박근혜 후보의 몇 마디 해명을 받아 적는 것으로 임무를 다 했다고 자부하는 정도였다.

2013년 2월 25일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부터 국내 주요 언론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독신 여성 대통령의 일과 이후의 사생활을 철두철미 보호하는 쪽으로 방침을 지켜 나갔다. 청와대 건물 구조가 가뜩이나 구중궁궐 같다며 비판의 도마 위에 올라오던 터라 일과시간 이후 대통령의 동선은 철저히 베일 속에 가려져 버렸다. 청와대 춘추관에 등록된 출입기자가 수 백 명에 달하지만 이전 정부들과는 달리 수석 비서관들과의 접촉은 원천적으로 차단되기 일쑤였다.

겨우 시늉만 내기에 바쁜 신년 기자회견부터 언론과의 소통은 언제나 불만 그 자체였다. 한 번은 ‘왜 대통령에 대한 대면보고가 없냐’고 기자가 묻자 박 대통령은 “수석 비서관들도 업무에 바쁜데 서면으로 주고받으면 훨씬 효율적이지 않느냐”고 말해 참석자들을 모두 실소케 했다.

박근혜 정부의 대언론 정책이 그렇다 하더라도 기자는 대통령의 24시간을 독자들에게 소상히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고, 국민은 그것을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 아사히(朝日), 요미우리(讀買) 등 일본의 주요 신문은 날마다 1면 고정난에 수상의 공식 일정표가 공개된다.

트럼프 당선자와 만나기 위해 미국을 방문 중인 아베 수상은 지난 22일 일본 동북부 후쿠시마에 7.3의 강진이 발생하자 30분 후 미국 현지에서 구호작업을 지시하는 순발력을 발휘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당시 청와대 안에 있었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대통령도 사생활은 보장되어야 하고, 여성일 경우 그것은 더욱 보호돼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임기 후반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박 대통령의 일과 이후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언론에 소개된 적이 없었다. 독신으로 살고 있는 박 대통령이 구중심처인 청와대 안에서 과연 어떻게 저녁시간을 보내는지 의문을 제기한 언론조차 본 적이 없었다.

생일 같은 때 동생들(박근영, 박지만)을 청와대로 불러 친형제·자매끼리 머리 맞대고 밥이라도 한 끼 먹기나 하는 것인지, 오래 전부터 시작했다는 국선도 수련은 청와대 안에서도 사범의 지도 아래 하는지 아니면 혼자서 하는지 등등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배우자도 없고 가족도 없는 박 대통령의 청와대 생활은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국민의 지대한 관심사지만 언론은 국민의 그런 알 권리를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언론은 고유의 직무를 철저히 유기한 셈이었다. 어떤 신문이나 TV가 ‘독신녀 대통령의 청와대 24시’를 르포 형식으로 소개했더라면 박 대통령의 이미지는 지금보다 훨씬 인간적인 모습으로 형성됐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를 제대로 감시하지 못하고 직무유기로 일관한 언론들도 반성해야 한다. ©픽사베이

언론의 직무유기가 국정 농단 불러…참회 속에 국민의 알권리에 최선 다해야

사상 유례 없는 최순실의 국정농단도 언론이 제 할 일을 똑바로 했더라면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든 일에는 사전에 조짐이 있기 마련이다. 국내 언론은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는, 사후약방문 식의 뒷북치기를 습관처럼 되풀이 해오고 있다.

다시 한 번 되짚어 보자. 세계 유일하게 육군참모총장 출신이 지휘하는 한국의 대통령 경호실은 최순실의 청와대 무상출입을 정말 모르고 있었을까?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 눈감아 주었을까? 어느 쪽이든 용납할 수도 없고, 용납돼서도 안 되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다. 국정원도 마찬가지다. 청와대의 24시를 입체적으로 스크린하고 있어야 할 국내 최고의 정보기관 아닌가?

분명한 것은 청와대 경호실과 국정원조차도 최순실과 그 무리들의 청와대 무상출입을 묵인 또는 방조해 왔고, 그 배후에는 대통령이 있다는 사실이다. 놀라운 일이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일이 몇 년 동안이나 아무렇지도 않게 반복돼 왔음에도 언론은 이를 전혀 눈치도 채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나라당 대표 시절 갑자기 당명을 ‘새누리 당’이라고 바꿨을 때, 당의 로고 색깔을 오래 전부터 사용해 온 파란 하늘색 대신 빨간 색을 선택했을 때, 정부 로고 마크를 갑자기 대한항공(KAL) 로고처럼 빨강·파랑의 음양구조가 회오리치는 듯한 모양으로 바꿨을 때, 언론은 왜 그 배경을 심층 추적, 보도하지 못했는가?

또 새누리당 깃발 안에 이상한 디자인은 최근에 알려진 바로는 말 안장 모양이라고 하는데 왜 당시에는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못했는가? 그것이 말 안장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됐던가?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정무수석으로 있는 1년 동안 대통령과 한 번도 독대해 본 적이 없다고 실토하자 ‘나도 그랬다’는 사람이 줄지어 나설 때도 언론은 그것을 더 이상 캐보려 하지 않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2014년 청와대에서 ‘정윤회 문건유출 사건’이 터졌을 때만이라도 언론이 눈을 부릅뜨고 그 이면을 추적, 보도했더라면 사태가 이렇게 암 덩이처럼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박관천 행정관이 “우리나라 권력서열 1위는 최순실...”이라고 말했을 때 언론은 왜 그 이면을 심층 해부하지 못했는가? 박 대통령이 “근거 없는 유언비어”라고 일축하자 검찰도 언론도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지나쳐 버린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

박근혜 대통령이 어느 날 갑자기 ‘우주의 기운’ 운운하며 낯선 어휘들을 사용했을 때, ‘북한은 2년 내에 붕괴할 것’이라는 둥의 발언을 했을 때 청와대와 정보기관, 그리고 언론은 왜 그 배경을 의심해 보지 못했는가?

대통령 후보시절 대표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경제민주화’에 대해 메이저 언론은 취임 후 그 추진 상황을 전혀 감시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가 취임 후 한 일이라곤 자신의 공약을 하나하나 뒤집는 일 뿐”이라는 비아냥이 넘쳐 나는데도 보수 언론들은 이를 반영하지 않았다. 철저한 직무유기인 셈이다.

1997년 IMF 당시 중앙일보 손병수 기자는 국내 기자로는 유일하게 “경제부 기자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며 참회에 가까운 칼럼을 써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같은 맥락에서 이번에는 정치부 기자들이 뼈를 깎는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들이야말로 이번 사태를 불러 온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고, 또 앞으로 진행될 사태의 추이를 종전의 진영논리가 아닌 냉철한 이성의 잣대로 국민에게 알려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오피니언타임스=김준범]

 김준범

 (주)대한공론 상임 고문

 전 국방부 국방홍보원 원장

 전 중앙일보 정치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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