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요섭의 동호지필]

우리네 식탁에서 3찬 밥상에도, 9찬 밥상에도 늘 자리를 차지하는 터줏대감이 있다. 반찬의 가짓수가 아무리 줄어도 끝까지 남아있는 배추김치다. 김치는 서민들 밥상에서 마지막 보루와도 같다. 마땅한 먹거리가 없어도 잘 익은 김치만 있으면 밥에 물을 말아도 맛있다. 이런 연유로 집집마다 김치맛은 곧 손맛이자 자존심이 된다.

©포커스뉴스

아버지의 배추김치 사랑은 유별나다. 직접 배추농사를 짓기 때문이다. 완연한 가을에 접어들면 배추들은 몸집을 크게 부풀리고 키를 한껏 높인다. 마치 소년이 청년이 되며 광대가 솟아오르는 모습을 닮았다. 그렇게 자라나는 배추를 보는 부친의 모습은 영락없는 시골 농부다. 묵묵히 바라보는 눈빛에는 곡진한 애정이 담겨 있다. 그런 부친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 나를 저렇게 봤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의 밭을 일구는 과정에도 애정이 한껏 묻어난다. 아직 씨가 몸을 누이기 전에도 정성껏 땅을 고르고 돌을 솎아낸다. 비료를 넣은 자리 위엔 반드시 마른풀을 옮겨 심는다. 배추는 벌레가 몹시 많이 드는 것이어서 무농약으로 재배하려면 거미 같은 곤충들이 필수다. 마른풀은 벌레들의 천적이 살기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어린 자식 녀석 이불 덮어주듯 늙고 마른 풀을 땅 위에 덮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볼 때면 성성해진 당신의 머리칼과 풀의 모습이 고스란히 닮은 것 같아 마음 쓰릴 때가 있다. 나 또한 묵묵한 아버지와 닮은꼴이기에 따듯한 말 한마디 건네려다가도 얼굴이 뜨거워져 그만두고 만다. 그럴 때면 그저 밭일 돕는 것에 더욱 힘을 쏟을 뿐이다. 조금이라도 내 몫을 더 해내어 당신 손에서 흙 터는 모습을 일찍 보려고.

사실 마른풀에만 모든 걸 맡길 순 없다. 벌레를 잡으려면 배추를 들여다보며 핀셋이나 나무젓가락을 이용해야 한다. 게다가 농사일은 동적인 작업 못지않게 정적인 일들도 많아 꽤나 집중력을 요한다. 특히 더운 날에는 몹시 힘들다. 차라리 크게 크게 움직이면 좀 나으련만 햇볕 아래 가만히 앉아 풀을 뽑고 있으면 금세 지치고 만다.

매번 올해는 잘 되리라는 기대를 품고 한 해 두 해 버텨온 게 벌써 10년을 훌쩍 넘겼다. 키 작던 어린 꼬마는 어느덧 아버지보다 몸집이 큰 청년이 되었다. 농사 복(福)은 들쭉날쭉하다. 몇 해는 좋은 결실을 맺기도 했지만 가을걷이가 기대에 못 미칠 때가 많다. 농사꾼의 경험과 땀방울만으론 한 해의 수확을 점칠 수 없는 법이다.

지난 5일 충북 청주시 오송읍 들녘에서 농민들이 배추를 수확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흉작을 맞은 해면, 못 쓰게 된 배추의 겉껍질들을 하나하나 벗길 때마다 실패의 원인을 곱씹는다. 쉼 없이 내렸던 폭우나 배추를 얼린 추위, 기어코 살아남아 배추를 갉아먹은 벌레, 진드기까지 탓할 것도 많다. 하지만 원망과 한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 그 모든 것들은 우리의 잘못으로 귀결된다.

이제 안 되는 일 그만 놓으라고 한바탕 이야기를 쏟아냈고 아버지와 나의 냉전은 늦겨울까지 이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냉전이 아니라 나 혼자만의 입닫음이었다. 그러다 어느 하루 낯선 찬거리가 밥상 위에 올라왔다. 봄동무침이었다. 겨울에 심는 봄동은 가을배추처럼 속을 채우지 않고 그 겉껍질만 작게 키워 먹는 것이다. 입직을 위해 도심 고시촌에 들어서기 전, 예열한다는 생각으로 겨울은 방안에서 두문불출하며 지냈다. 내가 갇혀 지낸 그 허름한 농가는, 굳이 방문을 나서지 않아도 누구 한 사람의 생활 소리가 사라지면 ‘외출을 했나보다’ 하고 느낄 수 있을 만큼 작고 작은 시골집이었다. 책과 씨름하던 겨울은 부친의 외출이 잦았다. 작은 촌에서 갈 곳이 어디 있었겠는가. 봄동을 보고나니 당신의 발길이 밭으로 향했었음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늘 그런 사람이었다. 밭뙈기 하나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다. 농사가 잘 된 해면, 내가 함께 밭일을 거들 때는 보지 못한 곳 어딘가에 구덩이를 파 이웃, 친지에게 나눠 줄 배추를 따로 저장하곤 했다. 아버지의 타산은 철저히 타인을 위한 것이었다. 농가의 한 해 갈무리는 당장 먹을 것과 저장할 것을 나누는 것이지만 부친의 갈무리는 늘 질 좋은 배추를 이웃 친지에게 주기 위해 구덩이에 묻는 것이 먼저였다.

시골에서 나고 자랐건만 아직도 나는 농가 사람이란 이름을 갖기엔 부족한가 보다. 돌이켜보니 젊은 일꾼이 한탄만 하는 모습이 얼마나 못났는가. 한 해의 결실이 흉작으로 빚어져도 남몰래 다음을 준비한 늙은 농부의 속은 얼마나 깊고 가득 채워져 있는지, 마치 속이 꽉 찬 배추와도 같을 것이다. 밭을 일구고, 씨 뿌리고, 모종을 키우고, 퇴비 주고, 벌레 잡고, 가꾸고, 거두고, 갈무리까지. 이 모든 것의 과정이 배추 속 하나 하나에 서려 있다. 그 속을 보며 또 한 가지 사실을 배운다. 그래, 배추도 얼고 시들고 벌레 먹듯이 세상만사에 어디 좋은 일만 있겠는가. 그렇게 농가의 만사(萬事)가 배추에 담겨 있다.

봄동의 향긋함으로 입안을 채웠던 그해 겨울로부터 홀로 도심으로 떠난지 3년여가 지났다. 시골생활 못지않게 도시생활도 녹록지 않았다. 돌아보면 줄곧 흉작만 이어진 것 같아 괴롭고 분했다. 하지만 이것도 세상에서 유유히 흘러가는 만사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아직 어린 나는 속을 채우지 못한 배추다. 그 안을 채우는 것에는 못내 아쉬운 감정들, 서글픔들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도심과 시골, 그 경계에 서 있는 나는 언제가 되었건 내가 나고 자란 농촌에 다시 돌아와 머물고 싶다. 더 높은 것만을 바라보는 도시의 삶, 종(縱)으로만 점철돼 있는 그곳보다 더 큰 가치를 이룰 수 있는 곳. 무한한 횡(橫)으로 이루어진 농촌에서 인생의 밭을 가꾸며 속을 채워나가고 싶다. 속을 채우며 그 키를 더욱 높여가는 배추처럼 나의 기대도 한껏 부풀어 오른다. [오피니언타임스=조요섭]

※본 칼럼은 농촌 출신으로 도심 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익명의 ‘경계인’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조요섭

어쩌면 미학이란 것은 노동자에게 주어진 빵과 우유보다 훨씬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느낀 이후로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려 하는 사람입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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