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문화로 만나는 세상]

‘순실의 시대’라고 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나라가 쑥대밭이 된 지금의 대한민국을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 빗댄 말이다.

최순실과 그의 가족의 명령과 부탁에 따라 대통령이 재벌 총수를 만나 직접 앵벌이까지 하고, 그 하수인들이 국정을 농단하면서 온갖 심부름을 다한 것을 보면 그들에게는 ‘순실의 시대’, 그런 인간들에게 나라를 맡긴 국민들에게는 분명 ‘상실의 시대’이다. 그 자괴감과 허탈감, 분노로 국민들은 주말마다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든다. 청와대를 향해 “내려오라”고, “다 잡아넣어” 하고 소리친다.

그래도 그들은 눈과 귀를 막고 있다. 이제는 정말 국민 된 죄로 입에 담기조차 민망하고 어이없는 일까지 연일 드러나고 있지만, 무슨 속셈인지 새로 완장 찬 몇몇 추종자들까지 거짓 변명이나 일삼고, 앵무새처럼 지저귀기만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책 표지를 패러디한 ‘순실의 시대’. ©인터넷 커뮤니티

이렇게 ‘상실의 시대’ 만들어 놓고도…

무라카미 하루키는 1989년 3월 소설 <상실의 시대> 한국어판 서문에 이렇게 썼다. ‘진짜와 가짜가 똑같이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습니다. 진실의 언어가 있었는가 하면, 거짓의 언어도 있었습니다. 깨끗함이 더러움이 되었고, 더러움이 깨끗함이 되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반의 이런 ‘상실의 시대’가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으니 참으로 난감하다.

아직도 합리적 ‘의심’을 넘어 ‘사실’을 말해도 아니라고 우기거나 딱 잡아뗀다. 오히려 옛 동지였던 상대를 정신 이상자로까지 몰아버린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증거 앞에서 삼척동자도 웃을 엉뚱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것이 거짓으로 들통 나면 또 다른 거짓말로 덮으려 한다. 정의와 진실을 지키는 일이라도 되는 양, 최소한의 직업의식도 없는 앵무새들이 국민들을 향해 뻔뻔하게 그것을 반복한다.

대통령도, 그의 추종자들인 ‘골박’ 의원들도 입버릇처럼 “국민의 소리를 무겁게 듣겠다”고 말한다. 그 ‘무겁다’는 용어 자체도 어울리지 않지만, 듣기만 하겠다는 다분히 모르쇠로 들린다. 그들에 비하면 늦긴 했지만, 그리고 아예 시작하지 말았으면 좋았겠지만, 일말의 상식과 양심까지는 버리지 못해 고뇌 끝에 사의를 표명한 법무장관과 민정수석이 훨씬 인간적이다.

©픽사베이

‘거짓말 병’에 걸린 사람들의 변명들

살면서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거짓말하기>의 저자인 미국의 폴 에크먼은 사소한 것에서 큰 것까지 누구나 평균 200번의 거짓말을 한다고 했다. 이유는 크게 7가지로 처벌을 피하기 위해, 보상을 받기 위해,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거북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자존심을 위해, 정보를 통제하기 위해, 직업윤리를 지키기 위해서다.

여기에는 사회적 관습인 선의의 ‘하얀 거짓말(white lie)’도 있다. 의사가 환자를 위해 하는 거짓말, 젊은이가 자리를 양보하면서 ‘나는 피곤하지 않다’고 하는 거짓말이 그렇다. 이런 거짓말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거짓말은 검다. 사실을, 마음을, 생각을 그대로 말하지 않는다. 거짓말은 남을 속이기 위해서지만 반드시 먼저 자신부터 속여야 한다.

니체는 “가장 흔한 거짓말은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이라고 했다. 때문에 자신이 모르는 거짓말은 불가능하다. 거짓말을 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탄로 나지 않게 기억하고, 또 다른 거짓말을 생각해 놓아야 한다. 거짓말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나 갈등을 느끼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다. 누구의 말처럼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다. 그 거짓말이 충동적이든, 습관적이든, 자기 확신에 사로잡혀 상상과 조작을 진실이라고 믿는 ‘공상허언증’이든 모두 ‘병’이다.

그 병자들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막무가내로 지키려 하고 있다. 이미 검찰과 언론이 그 문을 열고 속을 들여다보고 있고, 그 문안에 있거나 기웃거렸던 사람들이 줄줄이 ‘사실’을 밝히고 있는데도 거짓을 말하고 전하고 있다. 증언과 통화녹음 등의 증거를 토대로 한 검찰의 수사결과를 모래성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대통령 변호사, ‘길라임’이란 가명은 감히 간호사가 붙인 것이며, 비아그라는 ‘고산병’ 치료를 위해 구입했다는 코미디 같은 변명을 전하는 청와대 대변인.

26일 서울 광화문일대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즉각 퇴진 5차 범국민행동’에 참여한 시민들이 촛불집회를 마친 뒤 청와대로 행진 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국민은 ‘진실의 시대’를 원한다!

그뿐인가. ‘최순실 게이트’가 한창 지어질 때, 비서실장을 한 사람은 막장 드라마도 혀를 내두를 기막힌 ‘우연의 반복’이 드러났는데도 서로 알지도, 만난 적도 없다고 잡아떼고 있다. 의사들까지 스스로 거짓말 병에 기억상실증까지 걸린 환자를 자처했다. 대통령의 변칙 처방에 다른 영수증까지 내밀며 “아니요”로 일관하다가 증거(기록)가 나오자 그제야 생각난 듯 엉뚱한 해명을 내놓는다. 유·무형의 이익이 없으면 절대 돈 한 푼 안 쓰는 우리나라 대기업이 수십억 원을, 그것도 아주 최근에 어린 대학생에게 주었으면서 기억을 못한다.

왜 이렇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열지 않으려고 억지 부리는 사람들은 판단력도, 기억력도, 부끄러움도, 믿음도, 양심의 가책도 없는 걸까. 대통령부터 그렇다. 자신들만의 ‘이기적 진실’에 빠져있는 걸까,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걸까, 아니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걸까.

혹시, 아직도 되돌릴 수 있는 ‘기적’을 바라는 것은 아닐까. 착각이다. 높은 파고와 난파로 이미 ‘박근혜 정부’는 복원력을 완전히 잃었다. 국민 96%가 밧줄을 놓았다. 국민들은 속속들이 제대로 알기를 원한다. 누가, 어떻게 대한민국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빠짐없이 그 책임을 묻고, 반드시 바로 잡기를 원한다. 이제부터라도 가짜와 더러움과 거짓의 ‘상실의 시대’가 아닌, 진짜와 깨끗함의 ‘진실의 시대’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피니언타임스=이대현]

 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전 한국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저서 <소설 속 영화, 영화 속 소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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