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더의 편지]

야당의 전략통 몇 명과 만났다. 대통령이 2선 퇴진을 사실상 거부하고 최순실 사태가 길어지고 있다. 지난 편지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응 구상이 가닥을 잡았고 절대로 스스로 물러나지는 않겠다는 방향이라고 썼다. 이제는 그동안 확실한 방향을 잡지 못해 오락가락하는 것처럼 보였던 야당도 선택의 가닥을 잡아가는 모습이다. 야 3당의 공식입장이라고 발표된 것은 탄핵을 추진하는 동시에 중립내각을 구성한다는 내용이었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총리 선임과 중립내각 구성은 물 건너갔다는 판단이라고 한다. 처음부터 중립내각의 실권을 가진 총리를 합의를 통해 선임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탄핵을 추진하기로 결정한 이상 굳이 총리 문제로 논란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해서 황교안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다고 해도 큰 문제는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의 총리가 마음에 든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탄핵된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힘이 없는 총리가 야당의 눈치를 보면 봤지 특별히 정치적 일정에 장애가 되는 일을 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게 야당 내부의 예상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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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 박 대통령 탄핵은 어렵지 않지만 중립내각은 물 건너갔다고 판단한 듯

야당이, 특히 문재인 전 대표 측이 예상하는 일정은 이렇다. 우선 국회에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의결한다. 여당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지할지가 문제이긴 하지만 김무성 전 대표가 탄핵에 앞장서기로 한 이상 국회에서 3분의 2이상 동의를 얻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듯하다. 그 과정에서 김무성 전 대표 측은 이미 발표한 것처럼 국회에서 개헌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을 탄핵을 지지하는 조건으로 걸 수도 있다. 물론 문재인 대표나 그 주변에서는 개헌으로 초점을 분산시키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국회에 개헌특위를 설치한다는 것은 이미 여야간에 합의된 사항이다. 개헌특위를 구성하고 논의를 시작한다는 합의 정도는 지금 개헌에 부정적인 문재인 전 대표의 입장을 감안해도 가능한 수준이다.

일단 국회에서 탄핵안이 통과되면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려야 한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은 1월말 퇴임한다. 탄핵으로 권한이 정지된 대통령이 새 헌법재판소장을 임명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고 그렇다고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하여금 새 헌법재판소장을 임명하게 할 수도 없다.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하면 가급적 1월말 이전에 결론이 내려질 수 있도록 헌법재판소를 압박하는 게 필요하다.

헌법재판소는 대법원과 달리 법리만큼이나 여론에도 민감한 측면이 있는 만큼 지금의 대중시위를 통한 압박을 계속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므로 탄핵 이후에도 시위는 계속 이어지도록 하되 시위대의 행진 방향은 청와대보다 헌법재판소 쪽으로 바꾸는 게 필요할 수도 있겠다. 1월말까지 결정이 내려지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늦어도 3월까지는 결정을 내리도록 밀어붙여야 한다. 여론의 압박이 지금처럼 유지되기만 한다면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무효로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탄핵결정이 확정되면 그 때부터는 바로 선거전에 들어간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 ©포커스뉴스

다자 대선구도 상정하면 고정 지지층 있는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가 유리할 수도

이런 시나리오대로 정말 일이 풀린다면 문재인 전 대표 측에서는 나쁠 게 없다. 시간을 감안하면 개헌에 대한 국회의 논의도 그 당위성을 인정하는 선에서 끝날 것이고 구체적인 방안은 대통령 선거전에서 각 후보들이 공약으로 내놓는 형태가 될 것이다. 대통령 선거전은 기존의 여당과 기존의 야당에서 갈라져 나온 신당이 각각 후보를 내서 이른바 1노3김의 87년 이후 처음으로 4명 정도의 유력주자들이 경합하는 형태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합집산이 있을 수 있지만 다자구도는 거의 확실하고 그렇다면 확실한 지지층을 가진 후보가 역시 유리하다. 그런 점 역시 20% 정도의 고정 지지층을 갖고 있는 문재인 전 대표로서는 괜찮다. 일부 여권 지지자들이 기대하고 있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등장도 여권의 분열이나 촉박한 시간을 감안하면 쉽지 않을 것이다. 아예 없었던 일이 되거나 등장한다 해도 둘로 갈라질 보수 세력이 하나로 모아지지만 않는다면 큰 의미를 갖기가 어렵다.

이런 생각 때문일까.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요즘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있는 문재인 전 대표의 얼굴빛은 나쁘지 않다. 목소리는 예전보다 한층 높아졌다. 자신감의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지율 문제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빠지는 만큼 문재인 전 대표에 대한 지지율이 높아져야 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도 문재인 전 대표 측에서는 처음부터 줄곧 선명한 노선을 걸었던 이재명 성남시장이 잠재적 지지자들을 일시적으로 가져간 것 일뿐 큰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문재인 전 대표는 그동안 가장 지지율이 높은 잠재적 대권후보라는 이유로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유보적인 표현을 써왔지만 이제 큰 방향이 잡혔고 다른 사람들과의 노선 차이도 없어질 테니 지지율 상승이 가능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야당 일부의 분석과 전망이기는 하지만 지금 분위기를 감안하고 논리적으로만 따져본다면 근거가 부족하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물론 과연 국회에서의 탄핵처리 과정이 순조로울지, 또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기대만큼 너무 늦지 않게 내려질 수 있을지, 그리고 예상대로 탄핵결정이 받아들여질지, 야당이 바라는 것처럼 여론의 압박이 추운 겨울을 견디고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 단계마다 변수도 많고 지금의 전망과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터무니없는 시나리오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하다.

5차 촛불집회가 열린 2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포커스뉴스

야당, 비상시국에 갈피 못잡고 여론에 편승… ‘국정 책임 의지’ 보여야

문제는 다른 데 있다. 국정공백 상황에서 문재인 전 대표, 혹은 야당의 전혀 역할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도 사실상 국정은 마비된 상태지만, 탄핵이 되면 대통령 권한대행이 있다고는 해도 국정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는 없다. 그리고 대선이 치러지고 새로운 정권이 출범할 때까지는 그야말로 정부는 손을 놓고 있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지금의 상황까지 오는데도 야당이 기여한 부분은 없다. 새로운 사실을 폭로한 것은 언론이었고 시민들은 야당의 촉구 때문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였다. 검찰이 제대로 수사를 하기 시작한 것도 야당의 요구 때문은 아니었다.

사태의 초기, 야당의 대응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중립내각을 요구하다가 총리인준을 거부했고, 국회에 총리추천을 하라니까 발로 걷어차더니 갑자기 영수회담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해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갈피를 잡지 못한 야당의 모습은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여론을 따라가려고만 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예상되는 일정에서도 야당은 여론에 기대기만 하려한다. 지금 야당이 예상하는 시나리오대로라면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끌어내는 일까지 시민들이 해야 한다. 이건 국민에게 짐을 떠넘기는 짓이다. 이렇게만 된다면 굳이 정치가, 혹은 야당이 있어야할 이유가 없다.

그 책임은 결국 문재인 전 대표에게 돌아간다. 문재인 전 대표 특유의 좌고우면하는 모습은 이번에도 여전했다. 정치는 광장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야당은 총리 추천, 장관 임면, 내각 통할을 제안한 대통령의 권한 이양을 적극 활용해 의회 주도로 비상내각을 구성해야 했다. 대통령이 2선 퇴진을 분명히 약속해야 했다고 말하지만 부질없는 얘기다. 약속을 한다 해도 그 약속이 반드시 지켜진다는 보장은 처음부터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과 부딪쳐 국정을 책임지겠다는 의지였다.

불행히도 문재인 전 대표와 야당은 비상시국에 국정을 책임질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광장에 나선 시민들의 눈치를 보고 여론의 추이를 살피며 지지율에 일희일비한다. 문재인 전 대표의 지지율이 높아지지 않는 것이 오로지 이재명 시장 때문일까. 혹 끊임없이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는 듯한 모습, 부자가 조금도 손해보지 않으려 몸조심을 하려는 듯 한 모습에서 비롯된 실망은 아니었을까.

지금은 정상적인 권력이 작동을 멈춘 상태다. 국회가 특히 야당이 앞장서서 시대를 설계하고 권력을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줘야 했다. 국민의 마음을 아는 것과 여론의 눈치를 보는 것은 다르다. 문재인 전 대표는 국민들의 분노는 대통령의 하야만으로는 치유될 수 없는 절망감의 표현이고 대통령의 퇴진을 넘어 시대를 교체하고 나라의 근본을 바꾸라는 준엄한 명령이라고 했다. 말 그대로다. 그런데 문재인 전 대표는 과연 시대를 교체하고 나라의 근본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일까. [오피니언타임스=인사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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