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 위에서 쓰는 편지]

정육점, 떡 가게, 화장품 가게, 꽃집, 오래된 이발소…. 고만고만한 점포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골목길이었습니다. 습관처럼 여기저기 해찰하다가 신기한 광경에 걸음을 멈췄습니다. 오토바이 하나가 느린 속도로 앞질러 가는데, 그 위에 탄 청년의 손에서 카드 같은 게 튀어나가더니 점포들 문 앞에 하나씩 뿌려졌습니다. 어찌 보면 나비처럼 사뿐히 앉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천천히 간다지만 달리는 오토바이에서 무엇을 어떻게 저리 정확하게 뿌릴까?

궁금증을 못 참고 주워봤더니 명함 크기의 전단지였습니다. 청년은 그걸 집집마다 서너 장씩 뿌리고 있었습니다. 전단지에는 큰 글씨로 ‘달돈·일수’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24시간 전화상담’ ‘아직도 비싼 이자 받으시고 대출 받으십니까?’ 같은 문구들이 따라붙어 있었습니다. 당연히 전화번호도 있고요. 눈길이 오래 머문 건 일수라는 단어였습니다. 빌린 돈에 이자를 더해서 매일 갚아나가는 것을 그렇게 부르지요. 주로 소규모 자영업자나 노점상들이 급할 때 쓰는 돈입니다.

전단지에는 대출 조건도 상세하게 나와 있었습니다. 100만원을 대출 받아 200일 동안 갚을 경우 매일 불입금이 5500원이었습니다. 총계를 계산하니 갚는 돈이 110만원입니다. 1000만원을 빌릴 경우 55000원씩을 매일 갚으니 총 1100만원을 갚는 게 되고요. 생각보다 그리 비싼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리대금을 써서 패가망신했다는 ‘무서운’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무뎌진 까닭일까요? 아무튼 그런 돈을 쓰는 사람들이 많으니 청년의 전단지 뿌리는 솜씨도 날로 느는 것이겠지요. 자영업자들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에 그 풍경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한데, 제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 것은 달돈이라는 단어였습니다. 달세나 월세처럼 한 달 단위로 돈을 빌려 쓰는 건가? 그렇게 짐작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만큼 안온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지기도 했습니다. 궁금한 걸 못 참는 성격이라 검색을 해봤습니다. 맨 먼저 연관검색어가 눈에 띄는데 대구달돈, 부산달돈, 울산달돈, 청주달돈 등으로 이어집니다. 광고도 한번 훑어봤습니다. ‘달돈 119머니’ 같은 문구가 쏟아지는 걸 보니 그런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모양이었습니다. ‘초간편 달돈, 최대 8천까지 무방문 당일대출!’ 급해서 달돈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욕먹을 소리겠지만 또 다른 세상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나라나 은행에 진 빚이 제법 많지만 아직은 ‘달돈’ 같은 것을 써본 적은 없었거든요.

‘묻고 답하기’에는 이런 질문도 있었습니다. “사업자 달돈 구할 수 있는 업체 있나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여럿이었습니다. “차라리 달돈보다는 안전하게 대출을 받아보시는 것을 추천해 드려요”라는 답변이 있는가 하면 “신청당일 안전한 월변 달돈 가능하십니다” 같은 답변도 있었습니다. 오래 눈길을 끈 질문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핸드폰이 연체되어 신용보증으로 넘어갔고요. 지금 당장 100만원이 급한데… 가능한곳 있을까요?”

©픽사베이

편지가 길어졌습니다.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고, 한발만 삐끗하면 제 자신의 이야기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주변에는 희망보다는 절망을 끼고 사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이 돈 저 돈 끌어 모아 차린 음식점에 남은 생을 기대보려던 가까운 이가, 버티다 결국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들은 게 엊그제였습니다. 어제까지 장사를 하던 집 유리창에서 ‘세놓음’이라는 글씨를 발견할 때는 괜히 눈 둘 곳을 모르기도 합니다. 제가 사는 곳 근처의 한 점포는 1년 새 주인이 세 번 바뀌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유가 한 둘이어야 운이 없다는 말로 치부하지요. 제도금융에서는 그들에게 더 이상 돈을 빌려주지 않습니다. 결국 일수나 달돈을 찾겠지만, 그렇게 빌려 쓴 돈을 제때 갚는다는 보장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렇다고 정부가 도와주는 것도 아닙니다. 아니, 어찌 보면 쪽박마저 깨는 경우도 많습니다. 지난달에는 정부가 부동산 투기 수요를 잠재운다는 명목으로 가계부채 총량 규제에 들어가면서 소득이 적고 신용등급이 낮은 서민들이 맨 먼저 유탄을 맞았습니다. 은행의 대출 심사 강화가 2금융권까지 확산되면서 서민들의 돈줄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하루 살아가기도 벅찬 이들이 설마 부동산 투기를 꿈꿨을까요. 돈은 필요한 사람에게 공급돼야 하는데, 우리의 금융구조는 돈이 있는 사람에게만 돌아갑니다.

나라가 정상일 때도 그렇게 핍박을 받던 삶인데, 폭풍처럼 몰아닥친 ‘박근혜 게이트’로 나라가 통째로 흔들리는 요즘, 서민들의 고통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정치인이든 관료든 자신들 살아남기에 급급한 판이니 가난한 이들의 눈물이 눈에 보일 리 없지요. 윗물이 저지른 잘못의 피해를 고스란히 아랫물이 받는 셈입니다. 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생사가 오가는 문제일 수 있습니다.

골목에 뿌려진 전단지 몇 장의 잔영이 영 지워지지 않습니다. 달돈과 일수라는 말 자체가 우리의 민낯인 것 같아서 차마 구겨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오피니언타임스=이호준]

 이호준

 시인·여행작가·에세이스트 

 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문명의 고향 티크리스 강을 걷다> 外 다수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