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건의 드라이펜]

쿠바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가 지난달 25일 90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는 지난 4월 제7차 쿠바공산당전당대회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듯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90살까지 산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고, 노력한 결과도 아니다. 우연일 따름이다. 나도 곧 다른 이들처럼 될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차례가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열정과 존엄을 갖고 일한다면 인간이 필요로 하는 재화와 문화를 창출해 낼 수 있다는 증거로 쿠바 공산주의는 남게 될 것이다.”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가이며 전 국가평의회의장인 피델 카스트로가 11월25일 향년 90세로 타계했다. 카스트로는 1926년 생으로 1959년 친미 독재정권을 전복하고 쿠바혁명에 성공, 1961년 국가평의의장으로 취임 후 2006년까지 집권했다. ©게티이미지/포커스뉴스

12월 4일 치러진 장례식에서 그의 운구는 1959년 그가 혁명군을 이끌고 동남쪽 그란마 주에서 서북쪽 수도 하바나까지 진군했던 길을 역진해 하바나에서 고향인 동남단 산티아고 데 쿠바 주로 향해 그곳의 산타 에파헤니아 묘지에 묻혔다. 거기에는 쿠바 혁명의 아버지 호세 마르티와 필자가 좋아하는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의 가수 콤파이 세군도도 묻혀 있다.

1959년 체 게바라와 함께 쿠바공산혁명을 성공시킨 후 2008년 국가평의회 의장직에서 은퇴하기까지 49년간 쿠바를 통치한 카스트로는 1960~70년대 격동의 시대에 혁명을 꿈꾸던 전 세계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다.

카스트로의 일생은 미국과 대결로 점철됐다. 혁명으로 친미적인 바티스타 정권을 타도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1961년 카스트로가 쿠바 내 미국인을 추방하고 미국인의 재산을 몰수하자 미국은 외교단절과 경제제재로 보복을 시작했다.

미국은 그해 아예 1500명의 특공대를 침투시켜 카스트로 정권의 전복을 기도한 피그만 사건을 일으켰다. 정보의 사전 누출로 특공대원들이 죽거나 생포돼 미국에게는 치욕을 안겼고, 카스트로는 기고만장했다. 그 연장선에서 1962년 미·소 관계를 핵전쟁 일보 전으로 몰아넣었던 쿠바 사태가 발발했다.

쿠바 사태는 소련이 쿠바 내 미사일 기지 건설을 중단하되,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해결됐다. 그러나 미국의 카스트로 정권 전복 기도는 끊이지 않았다. 카스트로는 자신에 대한 미국의 암살기도가 630여 차례나 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권좌에 있을 동안 줄곧 미국과 적대했으나 흑인 출신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 대해서는 그가 후보였을 때부터 호감과 기대를 표시했다. 그것이 그의 정계은퇴 이후인 2014년 미·쿠바 간 국교 재개, 2016년 오바마 대통령의 역사적 쿠바 방문으로 이어졌다.

4일 쿠바에서 카스트로의 관을 실은 운구차량이 슬픔에 잠긴 시민들 사이로 지나가고 있다. ©게티이미지/포커스뉴스

필자는 지난 2월 쿠바를 잠시 여행하면서 카스트로 집권 49년의 명암을 볼 기회가 있었다. 혁명 1세대이자, 비동맹권의 지도자로서 카스트로와 김일성은 친밀한 사이였다. 그는 1980년대 평양을 공식 방문하기도 했다. 나는 쿠바가 북한과 비슷한 체제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나의 생각은 반은 틀렸고 반은 맞았다. 틀린 것은 카스트로의 밝음이었고 맞은 것은 어둠이었다. 쿠바에는 자유가 있었다. 개인 우상화와 함께 3대 세습, 핵무기 개발도 없었다. 거리엔 카스트로의 동상 하나 없었다. 신앙과 예술의 자유는 있었다. 동네마다 성당이 있었고, 식당마다 밴드의 연주가 흥겨웠다.

카스트로는 혁명동지였던 그의 동생 라울에게 권좌를 넘겨주면서, 10년만 머물라고 했다. 그는 라울로의 권력 승계는 혁명의 승계이지 혈통승계가 아니라고 했다. 그에게 권력 세습은 공산주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라울은 2018년에 당료에게 권력을 넘겨줄 준비를 하고 있다.

카스트로의 한반도에 대한 인식은 김일성 사후 많이 바뀌었다. 그는 특히 김정일 김정은 체제의 핵무기 개발을 ‘정신 나간 짓’이라고 했다. 그는 자국 내에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려다 쿠바 사태를 겪은 경험을 통해 핵무기 개발의 무모성을 일찍이 깨달았다. 전력난에도 불구하고 원자력발전을 시도하지 않은 것도 미국으로부터 핵개발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였다.

카스트로의 어둠은 대부분 통제경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개방의 정도는 외화수입의 절반정도가 관광수입에 의한 것으로 보더라도 북한보다 앞서 있지만 개방과 통제의 엇박자가 빚어내는 체제의 누수현상은 심각했다.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추었음에도 농업과 제조업은 경쟁력을 잃어 많은 식품과 공산품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고속도로 하나 건설되지 않았을 정도로 사회간접자본도 부실했다. 북한의 위정자들이 북한을 낙원이라고 하듯이 카스트로는 이런 쿠바를 낙원이라고 강변했다.

산타 에파헤니아에 마련된 카스트로의 무덤. ©게티이미지/포커스뉴스

카스트로는 북한의 김일성을 혁명의 선배라고 존경했다. 1980년대 그는 평양을 찾아가 김일성을 찬양했다. 소련 해체 후 러시아가 원조를 중단했을 때 김일성은 소총 10만 자루를 카스트로에게 주었다. 그 결과 쿠바는 아직도 지구상에서 거의 유일한 한국의 미수교국이다.

카스트로의 죽음에 대해 북한은 3일간의 애도기간을 정하고,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평양주재 쿠바 대사관에 조문하고, 2인자인 최용해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한 대규모 조문사절을 파견하는 등 수선을 피우고 있다.

쿠바는 북한의 중남미 외교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다. 쿠바를 잃으면 미주 지역에선 모두를 잃게 된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다. 쿠바 공산당 내부에 잔존하는 김일성-카스트로 시대의 구세대인사들을 이용해 외교의 명맥을 이어가려는 안간힘이다.

그런 노력보다는 핵개발을 중단하라는 카스트로의 충고를 이행하는 편이 북한 외교를 탄탄하게 하는 길임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북한은 11월 30일 5차 핵실험에 대한 유엔 안보리의 재제로 유엔 회원국 자격이 박탈될지도 모를 상황으로 내몰렸다.

북한에 비하면 우리의 카스트로 조문 외교는 너무 안일하다. 외교장관 명의의 조전 하나 보내고 조문단을 보낼까 말까 망설이다 말았다. 아무리 탄핵정국이라 해도 외교만큼은 방심해서는 안 된다. 쿠바와의 수교만한 확실한 대북압박은 없다. 문상은 화해를 위해서도 좋은 기회다. [오피니언타임스=임종건]

 임종건

 한국일보 서울경제 기자 및 부장/서울경제 논설실장 및 사장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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