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요의 미디어 속으로]

“우리나라 재벌들은 기본적으로 조직 폭력배들이 운영하는 방식과 똑같아서 일단 누구라도 한마디 말을 거역하면 그거를 확실히 응징해야 다른 사람들이 말을 따라간다고 생각하는 그런 논리가 있습니다.”

지난 6일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사건 국정조사’에서 주진형 한화투자증권 전 대표가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세습권력, 재벌은 영원하다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를 보면서 깜짝 놀랐다. 주진형 한화증권 전 대표가 작심하고 재벌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재벌 총수 9명이 처음 증인으로 출석한 청문회를 온 국민이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증인으로 출석한 전 고용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바로 뒤에 참고인으로 앉아 있었다. 국회의원은 재벌 비판을 금기시한다. 우리나라 정치권력은 자본권력에 점차 예속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정치세습은 박근혜 대통령이 한 차례 보여주는데 그쳤지만, 재벌은 대부분 3대째 세습을 이어오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미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작년 7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했다. 합병 비율은 제일모직 0.35에 삼성물산 1이었다. 삼성물산 주식 100주를 제일모직 주식 35주와 같은 가치로 쳐서 합병 법인의 주식으로 바꿔준다는 것인데, 삼성물산 주식의 가치가 제일모직 주식 가치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한 엘리엇매니지먼트는 이 같은 조치가 삼성물산 주주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인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도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합병 반대를 권고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ISS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비율이 0.95:1 정도가 적정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세계 2위의 의결권 자문회사인 글래스루이스도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합병안에 반대할 것을 권고했다.

검찰이 지난달 23일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를 압수수색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국민연금이 세습을 지원했다

세계적인 자문회사이자 국민연금관리공단의 자문기관이기도 한 서스틴베스트도 이 같은 합병에 부정적인 보고서를 내놓았다. 그러나 의결권이 있는 지분을 11.11%나 보유한 국민연금은 합병에 찬성했다. 관례와 달리 의결권자문위원회를 거치지도 않은 결정이었다. 자문기관들이 합병에 반대하는 상황에서 의결권자문위원회를 거치면 합병 반대로 결론이 날 가능성이 컸고, 이를 피하기 위해서라는 의혹이 일었다. 이 조치로 국민연금은 8000억원 가까운 손실을 본 것으로 평가됐다.

주진형 전 대표는 청문회에서 이런 말도 했다. “당시 처음 보도가 나왔을 때는 해도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나마나 저렇게 과대평가된 제일모직과 과소평가된 삼성물산을 자본시장법 시행령을 핑계로 합병을 하겠다… 저렇게 돈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치사한 짓을 통해서 하려고 한다는 데서 놀랐는데… 언론이나 모든 사람들이 아무 말도 안 하고 넘어가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랐고, 세 번째로는 그 과정에 국민연금까지 동원하리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도 못했는데 그 대담함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지난 7일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 앞에 ‘재벌도 공범’이라고 적힌 손팻말이 놓여 있다. ©포커스뉴스

최순실 게이트의 최대 지원자

아무 말도 안 하고 넘어간 것은 언론뿐만 아니었다. 영향력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합병에 찬성하거나 입을 다물었다. 증권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주 대표가 사장으로 있던 한화증권이 유일하게 반대 보고서를 냈다. 결국 삼성은 합병을 성공시켰다. 이재용은 국내 최대 재벌 삼성의 3대째 세습을 완성시켰다. 주 대표는 그 후 한화증권 사장에서 밀려났다.

주진형 대표는 합병에 반대하는 보고서를 내지 말도록 한화와 삼성으로부터 압력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진술도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은 수차례 재벌 총수들을 독대해 최순실에 대한 지원을 독촉했고, 재벌들은 제각각 민원 해결을 청원했다. 삼성은 미르·K스포츠재단에 204억원을 출연했고 정유라에게 35억원과 추가로 43억원, 장시호에게 16억원을 지원했다. 재벌들 중 독보적으로 많은 금액을 출연하거나 지원했다. 최순실과 박근혜에게 대리처방과 불법진료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차움병원과 차병원 그룹의 지주사인 차바이오텍에는 삼성 출신 인사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

심상정 대표 등 정의당 당직자들이 지난달 24일 전경련 소속 기업들의 정경유착 규탄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포커스뉴스

정경유착의 피해자는 국민

삼성의 3대 세습 완성으로 재벌중심 경제체제는 더욱 확고해졌다. 재벌중심 경제체제는 총수 일가에게는 천문학적 부를 안겨주지만, 경제 생태계를 초토화시키고 중산층을 빈곤계층으로 전락시켜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핵심 요인으로 지적받아 왔다. 미르재단 설립과 운영을 자발적으로 지원했던 전경련은 일반해고, 즉 저성과자 해고 합법화를 요구했다. 재벌들의 기부금 납부 이후 노동개악안은 정부 정책으로 받아들여져 40만 금융·공공노동자들의 목에 칼을 겨눴다.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에 온 국민이 분노한 것은 박근혜와 최순실 일가의 사익을 위해 공적이어야 할 국가 시스템을 동원했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박근혜와 최순실 일가의 사익 챙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를 고리로 광범한 정경유착이 이루어지면서 이른바 ‘헬조선’ 현상이 심화되었다는 점이 문제의 핵심이다.

지난달 12일 4차 촛불집회를 앞두고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서 한 참가자가 비정규직 철폐가 적힌 머리띠를 두르고 있다. ©포커스뉴스

재벌은 최순실 게이트 주범이다

재벌이 골목상권까지 침투하고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의 파산이 늘어나면서 경제 생태계가 교란되고 있다. 재벌체제는 저성과자 해고 합법화를 통해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있다. 일자리는 이들 비정규직과 단기계약직·일용노동직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긱 이코노미(gig economy) 현상이 확산되면서 아르바이트 형식의 불안정한 일자리가 새로운 형식의 노동인 것처럼 선전되고 있다. 재벌중심 경제체제는 고용보장을 외면하고 있다. 노동시장이 극단적으로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 여파로 국내 소비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소비와 생산의 선순환 구조는 이미 깨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경제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은 이들을 최순실 게이트 공범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들은 공범이 아니고 주범이다. 정경유착의 토대가 있기 때문에 최순실 게이트도 가능한 것이다. 초법적인 재벌은 항시적 몸통이고 최순실은 지나가다 걸리는 파리에 가깝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들을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주진형 대표의 말이다.

‘최순실 게이트’ 박영수 특별검사(오른쪽)와 수사팀장을 맡은 윤석열 검사 ©포커스뉴스

국정조사와 특검은 정경유착 검은 거래를 밝혀라

국회는 아직 이 부분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거나 의도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다. 그나마 ‘전경련 해체’로 그 실마리라도 찾은 것이 작은 성과다. 언론은 김기춘이 재벌들의 뒷배를 봐주기 위해 노동 관련 크고 작은 건을 꼼꼼히 챙기고 지시한 흔적을 보도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고 있다. 재벌 관련 부분은 아직 국정조사 주요 이슈가 되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정치권은 급격히 대선 모드로 접어들었다. 정치세력들이 이합집산하기 시작했고 각자 자신에게 유리하게 향후 일정을 끌어가려 하고 있다. 광화문 촛불의 궁극적 목표는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다. 정경유착과 이에 기생하는 관료·검찰·지식인·언론들의 기득권 연합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교체하고자 하는 것이다.

정경유착의 검은 거래를 밝혀내고 제대로 심판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재벌 총수들만 살찌우는 재벌중심 경제정책을 포기하고 양극화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은 국정조사 일정과 특검은 여기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오피니언타임스=이상요]

 이상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보도교양특별분과 위원

  전 <KBS스페셜> 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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