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요섭의 동호지필]

최근 행정부가 저지른 비위로 온 나라가 아프다. 기성세대의 한탄과 신세대의 환멸이 대한민국을 뒤덮고 있다. 요즘의 아픈 세태 탓일까. 출근길 버스와 지하철의 공기는 더욱 창백하다. 한해의 끝에 다다르고 있는 이 시점에서 문득 올해의 시작을 되돌아본다. 올해는 1997년에 태어난 아이들이 스물의 청년이 된 해였다. 97년은 광복 후의 최대 비리로 점철됐던 한보철강 부도사태가 일어났던 해다. 그때의 신생아들은 스물의 청년으로 장성했건만, 이 나라의 청렴도는 그날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 오히려 뒷걸음치고 있다. 슬프다. 의식의 죽음인가, 시대의 병폐인가.

비록 아픈 구석이 없진 않으나, 급속도의 경제성장을 이뤄낸 현대사를 가진 조국이다. 허나 그 급격한 성장 탓이었을까. 그에 걸맞은 시민의식은 함께 성장하지 못했고 그에 따라 크고 작은 비리들이 관행처럼 고착되고야 말았다. 청렴과 반부패라는 의제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 사회지도층의 대형비리만 다뤄져서는 안 된다. 지방에서 일어나는 소규모 토착비리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부패는 지도층만이 만드는 것은 아니다. 우리네 삶은 작은 생활반경에서도 부패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영란법 시행 첫날인 지난 9월28일 정부세종청사 인근 일식집이 점심시간에도 불구하고 손님이 없어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포커스뉴스

그런 굴레를 깨기 위한 노력으로 김영란법이 발의됐고 공식적으로 시행된 지 약 3달이 지났다. 곳곳의 식당가는 아예 3만원 이하의 김영란법 메뉴를 내놨고 공직자, 언론인, 교원 등 법 적용 대상자들도 스스로 경계하며 몸을 움츠리고 있다. 이를 보면 분명 실효성은 적지 않았다.

다만 나는 이 현상에 질문 하나를 던지고 싶다. 변화를 이행하고 있는 자들의 태도는 ‘마땅히’인가? ‘마지못해’인가? 답을 들을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법치사회의 균열은 법률의 맹점에서 나온다. 사회 자체가 법률에 부응하려하는 자발적 동행 없이, 마지못해 지켜지는 법률은 기어코 무너지기 마련이다. 역사가 그를 증명한다.

과거 명을 세웠던 주원장은 부정부패라면 치를 떨었던 사람이다. 재임기간 동안 무려 10만 명의 부패관리를 죽였다니 당시의 시대상이 어떠했는지 그 수치가 말해주고 있다. 부패가 일어날 때마다 더욱 엄격한 형률을 세우고 온갖 잔인한 극형으로 늦은 밤까지 부패관리를 죽였건만, 다음날 아침이면 또 다른 곳에서 부정을 저지른 관리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에 주원장은 ‘관리들이 어찌 지엄한 형률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하며 크게 한탄했다고 하니, 이것은 결국 수동적인 법률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일찍이 증명한 역사로 볼 수 있다.

물론 김영란법 자체에 치명적인 형식적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철저히 수동적이며 강제적이라는 특성을 가진 법률이 살인이나 강도와 같은 강력범죄에는 예방의 실효성이 있을지언정 이미 부패가 만연해있는 사회에까지 장기적이고도 근본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대다수 국민들이 강력범죄와 관련된 법률은 마땅히 지킨다. 그와 같이 반부패와 관련된 법률 또한 ‘마지못해’가 아니라 ‘마땅히’ 지켜지기 위해서는 사회 내부에서 자체적인 청렴 분위기의 형성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이 청렴이 사라진 시대에는 그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법률의 강제성 하나만 믿고 그것에 우리의 사회를 온전히 맡길 순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를 타파할 해결책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원인부터 추적해보자. 청렴을 저버린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행동을 보자. 부정을 저지르는 행동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사람을 컴퓨터에 비유한다면, 그의 행동은 인생이란 과정에서 오랜 기간 축적된 데이터를 토대로 사리판단을 한 후에 나오는 것이다. 예컨대 길을 걷다 우연히 지폐가 많이 든 지갑을 주웠다. 어떻게 행동할 텐가. 혹자는 경찰서에 가져다 줄 테고, 혹자는 이를 취하고 말 것이다. 이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그 사람의 인생 데이터에 어떠한 윤리관이 담겨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결정된다.

지난 1월 충북 청주 대성초등학교에서 한 학생이 수업 중 기지개를 켜고 있다. 청렴이 사라진 시대를 바로잡으려면 청소년기 인성교육을 강화해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포커스뉴스

가로로 나열돼 있는 인생 데이터를 세로로 높여 세운다면 가장 아래 부분이자 가장 넓은 기저를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청소년기일 것이다. 결국 그 시기에 어떠한 데이터가 축적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이 발하는 행동의 양상이 결정된다. 슬프게도 우리는 그 중요한 시기를 대부분 학교에서 보낸다. 심지어 가정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한다. 그만큼 교육의 현장이 가지는 중요성은 거듭 말해도 부족하다.

그러나 지금의 학교는 어떠한가. 그릇된 교육관이 교실을 뒤덮은 지 오래다. 학문을 좇는 일은 기계적 암기의 형태로 변모되어 버렸다. 또한 인격적으로 옳고 그름을 탐구하기보다는 5지선다의 객관식 앞에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것을 무의미하게 반복할 뿐이다. 오직 등수로 환산되는 우열의 나열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것만이 곧 옳은 것으로 치부되고 만다. 이런 교육관 아래 청소년들의 인성은 올바르게 자라지 못한다. 좀 더 큰 차원에서 생각해볼 때 이런 인성교육의 부재가 여러 사회적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문제들의 연장선에 부패를 저지르는 비극이 있다.

앞으로 사회를 구축해나갈 이들은 지금의 청소년들 아니던가. 훗날 조국이 가질 미래의 모습은 지금 교육의 현장에 자리하고 있는 청소년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나는 청렴의 시대를 이룩할 해결책이 바로 이 교육현장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특히 윤리, 도덕과 같은 학문에 있어서 단순 암기를 고수하는 기존의 교육방식을 타파하고 피부에 와 닿는 인성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세부적으로 언급한다면 먼 나라의 성자들, 낯선 이름을 가진 위인들의 행적과 지나치게 관념적인 그들의 윤리론을 좇기보다는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우리 시민들이 실천한 좋은 사례들을 교과서에 싣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이와 같이 변화된 방식으로 청렴과 반부패의 가치를 높이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사람이 사람에게 가르쳐야 한다. 청렴이라는 가치 아래 사회적 변화의 첫걸음은 결국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

반부패를 위한 지속적 법제 마련과 함께 장기적인 인성교육의 강화가 계속된다면 그를 통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지가 의미 있는 변화로 이어져 자발적 청렴 분위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멀고 어려운 일이라고 쉽게 자조하지 말자. 더 나은 시대로의 이행을 위한 이 모든 것들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시행착오도 겪을 것이고 오래 걸릴 것이다.

다만 청렴의 시대를 이룩했다는 훗날의 결과가 아니라 그러한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사람들이 가졌던 앞날의 노력과 투쟁했던 모든 과정에 더 큰 가치가 본질로 자리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부패와 싸울 우리는 분명 가치 있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가치 아래 우리 청소년들은 귀중한 삶의 방향 하나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방향이 가리키는 끝은 곧 청렴일 것이다. [오피니언타임스=조요섭]

 조요섭

어쩌면 미학이란 것은 노동자에게 주어진 빵과 우유보다 훨씬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느낀 이후로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려 하는 사람입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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