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 위에서 쓰는 편지]

피델 카스트로. 쿠바를 49년간 통치한 ‘영원한 사령관’. 그가 타계(11월 25일)한지도 한 달 이상 흘렀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쿠바에 다녀온 지도 딱 그만큼 지났습니다. 공교롭게도 제가 쿠바에서 돌아오자마자 그가 눈을 감았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 즈음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쿠바 국민들은 카스트로를 어떻게 생각해요?”였습니다.

1979년 유엔에서 카스트로가 연설하고 있다. ©게티이미지/포커스뉴스

하지만 여행자인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었습니다. 현지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확인할 재간도 없거니와, 설령 물어본다고 해도 그 나라 국민의 총의를 듣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 쿠바에 있을 때 카스트로 위독설 같은 걸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쿠바 국민의 카스트로에 대한 평가는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최소한 ‘쿠바에 살고 있는 쿠바인’들에게 카스트로는 외부에 알려진 만큼의 ‘독재자’는 아니었습니다. 존경까지는 모르겠지만 긍정적인 이야기를 듣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스스로의 ‘우상화’ 작업을 한 적이 없다는 점도 그런 평가의 배경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예를 들어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호세 마르티 기념비가 우뚝 서 있고, 체 게바라와 시엔 푸에고스의 얼굴이 건물 하나씩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혁명광장에 가도 카스트로의 얼굴은 없었습니다. 전국 어디에 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행적을 극적으로 완성시켜준 것은 그가 유언으로 남겼다는 “나를 숭배하지 마라”는 말이었습니다. 실제로 피델의 동생이자 국가평의회 의장인 라울 카스트로는 “그의 이름을 딴 기관이나 공원, 거리가 만들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어서 지난 27일에는 ‘카스트로 전 의장에 대한 우상화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고 들은 것은 아주 단편적인 사실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카스트로가 타계한 뒤 쿠바 국민들이 보인 반응이 차라리 현실을 더욱 잘 반영할 것 같습니다. 카스트로가 타계하고 장례식이 열릴 때까지 쿠바의 모든 술집은 문을 닫았습니다. 무려 10일 동안이었습니다. 술과 음악과 춤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쿠바사람들로 보면 엄청난 일입니다. 사회주의 국가의 숨 막히는 강요가 상상될 수밖에 없습니다.

산타 에파헤니아에 마련된 카스트로의 무덤. ©게티이미지/포커스뉴스

외신을 통해 들려오는 아바나 시민들의 반응을 보면 그런 상상은 별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카스트로의 장례기간 동안 쿠바 국민들은 “피델은 영원하다”, “내가 피델이다”를 외치며 거리를 메웠습니다. 아바나의 한 시민은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카스트로는 세상을 떠났지만 언제나 우리의 사령관”이라고 그를 추모했습니다. “고통스럽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시민들의 목소리도 이어졌습니다.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정 반대의 반응도 있었습니다. 쿠바계 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는 축제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카스트로의 타계 소식에 마이애미의 ‘리틀 아바나’ 등 쿠바계 주민 밀집 지역에서는 주민 수천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폭죽을 터뜨리며 환호했다고 미국 언론이 전했습니다. 알다시피 마이애미는 지리적으로 쿠바와 이웃입니다. 1959년 카스트로가 혁명에 성공한 이후 100만 명 이상이 쿠바를 탈출해 미국으로 갔습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뉘는 반응은 카스트로가 죽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살아있을 때부터 그는 늘 엇갈린 평가 속을 오갔습니다. 그가 독재자의 이미지를 갖게 된 데에는 미국의 전략도 큰 몫을 했습니다. 혁명에 성공한 뒤 토지개혁, 민간기업 국유화, 외국자본 몰수 등을 강행한 카스트로는 미·소 냉전 속에서 소련 편에 섰다가 1961년 미국과 국교를 단절했습니다. 1962년에는 소련 핵미사일의 쿠바 배치를 시도하다 미국과 일촉즉발까지 가는 ‘미사일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서방으로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지요. 물론 카스트로가 정적들을 가혹하게 탄압한 것이 독재자라는 이름을 얻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2003년에는 반체제 인사 75명을 투옥하는 ‘검은 봄’ 사태를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쿠바인들에게 카스트로는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집권 초기부터 문맹률을 없애기 위해 교육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습니다. 또 쿠바를 의료 대국으로 만든다는 의지를 갖고 3000명에 불과하던 의사 수를 8만 8000명으로 늘렸습니다. 쿠바의 의료 능력을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기반이 그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글을 정리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저는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평가보다는, 자신의 우상화 작업을 하지 않고, 유언까지 남긴 카스트로의 확고한 의지에 주목합니다. 누구도 우상화의 유혹을 이기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곳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정은이 집권한 이후 전국에 250개 이상의 김일성·김정일 기념탑이 세워졌고, 약 35개의 김정일 동상이 새로 만들어졌다”는 북한의 우상화작업이 그렇고,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과 ‘국정역사교과서’ 역시 거기서 멀지 않습니다. ‘박근혜 게이트’로 나라가 뒤집어진 뒤에도,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이 광화문 광장에 박정희 동상을 세우자고 주장한 것이야말로, 우상화라는 게 얼마나 추한 속내를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우상화 유혹을 물리쳤다는 한 가지만으로도 피델 카스트로에 대한 제 평가가 자꾸 후해지는 까닭입니다. [오피니언타임스=이호준]

 이호준

 시인·여행작가·에세이스트 

 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문명의 고향 티크리스 강을 걷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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