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건의 드라이펜]

‘워터게이트가 사법절차 단계에 들어가고 정치적 스캔들에서 국가적 비극으로 비화되는 과정에서 보다 결정적으로 솔직하게 대처하지 못한 것은 나의 잘못이다. 워터게이트에 관한 나의 실수로 인해 국가와 대통령직(Presidency), 내가 그렇게 깊이 사랑했던 나라, 그렇게 크게 존중했던 제도에 끼친 나의 깊은 후회와 고뇌에 찬 고통의 깊이를 형언할 말이 없다.’

1974년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 하원의 탄핵이 발의되기 직전 대통령 직을 사퇴하면서 내놓은 성명서의 일부분이다. 40년도 넘은 일이지만 지금 읽어도 닉슨 대통령의 후회와 고통이 깊이가 느껴지는 글이다.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을 사퇴한 닉슨 미국 대통령 ©플리커

워터게이트 사건은 닉슨 대통령이 처음부터 솔직하게 시인하고 사과를 했더라면 탄핵까지 가지 않았을 사건이었다. 닉슨은 자신의 혐의를 은폐하는 과정에서 거짓을 말하고 수사를 방해한 것이 위증과 사법방해의 중죄(Felony)가 되어 하원 법사위에서 탄핵이 발의돼 하원 본회의에 회부되기 직전 사임했다.

“과거엔 역겨운 통치자의 제거는 암살로 달성됐다. 절차적 제거방법으로 탄핵이 바람직하다”고 한 사람은 벤자민 프랭클린이다. 의회가 위법행위를 저지른 공직자를 파면하기 위해 도입된 탄핵제도는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다. 지금 불행히도 한국이 그 한 가운데 있지만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닉슨 탄핵이다.

어느 나라든 살아 있는 권력을 파면시키는 일은 쉽지 않다. 대통령이라는 최고 권력이 탄핵대상일 경우 특히 그렇다. 건국 240년의 역사를 가진 미국에서도 대통령에 대한 탄핵발의는 세 번밖에 없었다. 그중 두 번은 상원에서 부결됐고, 닉슨만이 하원 및 상원 탄핵 절차 전에 사임했다. 사실상 미국에서도 탄핵으로 물러난 대통령은 없는 셈이다.

미국에서 탄핵제도가 도입된 1789년 이후 62차례 발의됐지만 종신직인 판사들이 주요 대상이었다. 대통령이 4년 임기제인 것도 탄핵이 잦지 않은 이유다. 임기 중의 위법행위는 웬만큼 중대한 게 아니면 다음 선거에서 심판하면 된다고 보는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 탄핵은 하원 법사위와 하원 전체회의에서 다수결로, 상원에서는 3분의2 이상 찬성으로 가결된다. 보통 국회에서 야당에 의해 발의되는 탄핵이지만 상원 통과는 여당의 동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닉슨은 양원에서 가결이 확실하다는 당시 여당인 공화당 지도부의 정세판단 보고를 듣고 스스로 사임을 결정했다. 위증의 결정적인 증거물인 녹음테이프가 공개되자 닉슨에 한 가닥 신뢰를 지녀왔던 상당수 공화당 의원들이 등을 돌린 결과였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불을 댕긴 계기는 최순실 게이트의 증거물인 태블릿PC의 폭로였다. 그것은 닉슨탄핵에서의 녹음테이프 공개만큼의 폭발력을 발휘했다. 그로인해 한국 국회에서 여당의원의 절반 정도가 탄핵찬성으로 돌아서게 했다.

1998년 클린턴 대통령은 모니카 르윈스키라는 여성 인턴 직원과 백악관에서 가진 부적절한 성관계로 인해 하원에서 탄핵됐다. 한국인의 상식으로 보면 탄핵사유로 차고도 넘치는 위법이지만 상원에서 여당인 민주당 의원들은 한 사람의 이탈도 없이 탄핵에 반대표를 던져 대통령을 구했다. 투표가 정파주의로 흐를 때 탄핵안의 가결이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였다.

닉슨의 하야를 가능케 한 보다 결정적인 원인은 후임 대통령에 의한 사면이 보장됐기 때문이었다. 닉슨 사임 후 부통령에서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포드대통령이 비난여론을 무릅쓰고 모든 형사적 책임에서 닉슨을 사면했고, 탄핵도 중단됐다. 그 일로 그는 재선에 실패했지만 역사는 그의 결정이 옳았다고 평가했다.

‘최순실 게이트’로 직무 정지된 박근혜 대통령 ©청와대

박 대통령이 탄핵으로 파면을 당하던, 탄핵기각 이후 중도 사임을 하던 사면권자의 부재로 법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 닉슨의 경우와 다른 점이다. 대통령을 감옥에 보내야 한다고 아우성이지만 탄핵과 임기중단 자체로도 형벌의 효과는 충분하다는 여론도 엄존한다.

닉슨 대통령을 탄핵한 미 하원 법사위의 로디노 위원장(민주당)은 훗날 “탄핵 결정을 내리던 날 아내와 전화를 하면서 울었다”고 회고했다. 대통령을 탄핵한 야당위원장의 그런 모습은 차라리 아름답다. 지금 우리 사회는 대통령 탄핵에 대한 고뇌보다 증오와 대결이, 그리고 탄핵을 외치는 대중의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에 영합하는 정치인들로 넘쳐난다.

정부수립 70년밖에 안 된 나라에서 두 번이나 대통령이 탄핵된 것은 불행한 일이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헌재의 기각결정으로 다행히 임기를 마칠 수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는 치열한 법률적 논쟁을 거쳐야겠지만 최순실 국정농단이 무죄판정을 받지 못하는 한 임기를 채우기 어려울 전망이다.

박 대통령은 탄핵철회를 전제로 조기 사임의사를 밝혔으나 시민과 야당으로부터 진정성이 의심을 받아 무산된 뒤 지금은 헌재의 탄핵심판 결과에 따르겠다는 입장이다. 탄핵이 가결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즉시 민간인 박근혜는 기소되어 법정에 서게 된다.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나 탄핵이 기각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박대통령은 임기를 채우기 어려울 것이다. 국정운용의 동력을 상실한 처지에서 대통령직 유지는 시민사회의 새로운 저항을 부르고, 스스로에게도 고통만을 안길 것이다. 중도 퇴진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하겠다.

우리 사회가 촛불과 태극기로 갈라진 탄핵정국에서 종국적으로 벗어나는 길은 박근혜 대통령을 사면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박 대통령 퇴임 두 달 뒤 선출되는 다음 대통령이 국론 분열을 덜고, 정국의 안정을 기하기 위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때 필요한 것이 포드대통령의 용기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퇴임하던 박 대통령의 흉중에선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무죄를 몰라주는 세상에 대한 원망이나 그 누구에 대한 탓만이 아니었으면 한다. 닉슨의 퇴임사에서 박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남길 마지막 말이 무엇일지를 생각했으면 좋겠다. [오피니언타임스=임종건]

 임종건

 한국일보 서울경제 기자 및 부장/서울경제 논설실장 및 사장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