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다시 새해가 밝았습니다. 하지만 분단의 깊은 골은 여전히 요지부동입니다. 올해로 우리 겨레가 갈라진 지 벌써 몇 해째입니까? 왜 이렇게 엄청난 불편과 장애를 그대로 방치해두고 있단 말입니까? 1945년 일본제국주의의 압제와 속박으로부터 풀려난 직후 국토와 민족은 이미 반쪽으로 갈라지고 있었습니다. 해방의 감격과 분단의 비애는 함께 태어난 이란성(二卵性) 쌍둥이였습니다.

그로부터 무려 72년 세월이 덧없이 흘러버렸네요. 엄청난 동족상쟁도 치르고 격동과 변화를 많이도 겪었습니다. 분단이 빚어낸 각종 모순과 불합리, 폐해를 깨닫고 비통해하며 이를 극복하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피땀 흘리며 분투했던 것입니까? 하지만 아직도 겨레는 둘로 나뉜 그대로입니다. 어둡던 밤이 지나도 여전히 칠흑(漆黑)의 밤이요, 혹독한 겨울이 간 뒤에도 여전히 무거운 겨울이 그대로 우리를 휘감고 있습니다.

올해도 새해 새 달력을 바꿔 걸면서 삼일절, 광복절, 개천절 등 국경일을 유심히 눈여겨봅니다. 언젠가는 이 사이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민족최대 국경일이 아직도 빠져있다는 사실에 괜히 시무룩해집니다. 그것은 바로 통일절입니다. 우리 모두가 갈망하는 감격의 그날은 과연 언제 어느 달 어느 날이 될지 미리부터 상상해 봅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1년 8개월 만에 재개된 2015년 10월20일 강원도 고성 남북출입사무소에서 이산가족들이 손을 꼭 쥐고 출경장으로 향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지난 2011년 벽두에 나는 가슴 설레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자유아시아방송의 라디오프로 ‘남북이 함께 부르는 노래’ 제작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이었지요. 프로그램 제목부터 흥분으로 가슴이 뛰었습니다. 미국 워싱턴DC에 본부를 두고 있는 자유아시아방송(Radio Free Asia, 약칭 RFA)은 1996년 미국에서 설립된 국제방송국입니다. 미국 하원의 지원을 받아 중국어, 티베트어, 베트남어, 버마어, 한국어, 라오스어, 크메르어, 광동어, 위구르어 등 9개 언어로 아시아전역을 향해 현재 단파, 중파, 위성방송을 송출하고 있지요.

한국어방송은 1997년에 처음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현 단계에서 이 언론활동의 중요성은 뉴스와 정보에 자유롭게 접근하지 못하는 북한주민들을 대리한다는 목적 바로 그것입니다. 하루 5시간 편성으로 한반도주변의 소식과 논평, 기획보도물 등을 방송하고 있는데요. 무엇보다도 사실전달을 가장 중시하며 설교방식, 단순 메시지전달 방식, 주관적 표현, 아젠다 제시 따위는 경계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북한은 자유아시아방송의 활동에 대해 상당한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외국 방송이 자국의 사회주의체제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판단 때문이지요. 그로 말미암아 모든 주민들은 외부 라디오방송의 청취가 불가능합니다. 만약 어느 북한주민이 외국에서 라디오를 구입해 국내로 들여오게 된다면 반드시 당국에 의무적으로 제출해야만 합니다. 당국에서는 그 라디오의 다양한 채널을 임의로 고정시켜버립니다. 외부방송 청취차단이 그들의 중요한 목적이지요.

북한당국은 오로지 주민들이 삼대에 걸친 김일성 일가의 공적을 찬양하는 공영방송만 청취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조치가 그동안 표면적으로는 성과를 거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인민반으로 구성된 조직이 항시 이웃의 일상을 검열함으로써 혹시라도 남한방송을 몰래 청취하는 것은 아닌지 엄중하게 감시를 해왔습니다. 남한방송을 청취한 주민들이 발각되었을 경우 이에 대한 북한당국의 처벌은 매우 잔혹하다고 합니다.

자유아시아방송 편성표 ©이동순

1990년대로 접어들어 두만강, 압록강 등 중국과의 접경지대를 통한 탈북이 빈번하게 이어지면서 주민들의 삶과 분위기는 예전에 비해 크게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중국을 수시로 드나드는 북한 밀수업자들은 주민들이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지 먼저 파악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이 바라고 원하는 품목들 중에는 라디오가 우선순위로 손꼽힙니다. 밀수업자들이 중국에서 라디오를 대량으로 구매해서 북한으로 유입시켰지요. 그 라디오는 특히 작은 사이즈로 휴대가 간편해서 몰래 지니고 다니기에 수월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상시에 물품을 감추기에도 용이했습니다.

이렇게 북한으로 유입된 라디오가 북한사회의 근본을 조금씩 바꾸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만 합니다. 라디오를 통해서 북한주민들은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외부세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존재감과 정체성, 현실인식을 지니게 됐던 것입니다. 이 라디오를 통해서 그들의 가장 즐겨 듣는 방송이 바로 자유아시아방송이라고 합니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탈북자들의 회고와 기록들을 통해서도 쉽게 확인이 되지요.

자유아시아방송에서는 매주 월요일 오후 1시부터 30분 동안 ‘남북이 함께 부르는 노래’라는 라디오프로를 진행합니다. 나는 이 프로에 지난 7년 동안 매주 고정출연했습니다. 내가 선정한 3곡의 대중가요를 해당 프로그램의 앵커(이장균 선생)와 더불어 특집테마가 있는 대담으로 엮어서 보내드립니다. 방송의 분위기는 매우 편안하고 안정감을 담보하면서 청취자에게 흥미로운 분위기로 엮어갑니다.

녹음시간이 다가오면 내 가슴은 마치 혼례식에 나갈 새신랑처럼 설레고 두근거리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기다리는 북한 동포들과의 즐겁고 행복한 만남이 곧 이루어진다는 기대와 감격 때문이지요. 사계절의 변화, 국내외 여러 신선한 소식들, 한국대중음악사와 관련된 흥미진진한 에피소드와 이면사(裏面史)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가노라면 얼마나 흐뭇하고 가슴 뿌듯한 보람이 느껴지는지요.

2007년 7월 28일 평양에서 촬영한 북한 주민 모습 ©플리커

‘남북이 함께 부르는 노래’에서 가장 역점을 두는 포인트는 북한 동포들과의 살뜰한 교감(交感)입니다. 방송을 하다 보면 평양을 비롯해서 원산, 함흥, 청진, 사리원 등 북한농촌마을 주민들 곁으로 직접 찾아가 그들과 마을회관 같은 데서 함께 어울려 앉아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는 분위기로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특히 우리 겨레가 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을 중심으로 선곡해서 이야기를 신명나게 들려드리는 데요. 이러한 시간에 나의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는 이 작지만 보석같은 활동이 갈라진 조국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감격의 그날을 앞당기는 데에 소중한 잉걸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사뭇 뜨거운 힘이 용암처럼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시인으로서 시작품을 통해 통일과 민족화합을 노래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지만 방송을 통해 직접 통일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펼쳐간다는 것에 무한한 자부심과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북한을 다녀온 추억이 떠오르는데요. 어느 틈에 십년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때 평양, 묘향산 등지를 두루 관람하고 돌아왔었는데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김포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평양의 순안공항에 내리자 미리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버스 안에는 안내원들이 여섯이나 배치되어 일행들의 동태를 줄곧 감시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짧게 깎은 머리에 칼칼한 성격이 그대로 느껴지는 안내원들은 여름이라 짧은 남방셔츠를 입었는데 드러난 팔뚝의 한 부분에서 ‘충성’이라고 새긴 문신이 눈에 섬뜩하게 들어왔습니다. 특유의 북한식 글씨체로 쓰인 파란 색깔의 문신은 짐작컨대 인민군 복무시절 군대에서 새긴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한 보도자료를 보았더니 북한의 청년들도 인민군 복무시절에 문신을 새기는 습관들이 더러 있는데 그 문구들은 대개 ‘충성’ ‘청춘’ ‘혁명’ ‘어머니’ ‘한 마음’ ‘조국을 지키자’ ‘승리’ ‘전투’ 등이라는 대목이 생각이 났습니다. 총(銃)의 생김새라든가 자신의 군 입대날짜 따위를 새기는 경우도 있다더군요. 하지만 이것도 사상해이(思想解弛)란 명분으로 강력한 금지와 규제가 있었다고 하네요. 여러 안내원들은 사실상 감시자로 동행하면서 하루일과를 끝내고 남한방문객들이 잠자리에 들면 그때부터 다른 일과가 시작됩니다. 그날의 일정을 자체적으로 정리반성하며 상호 비판하는 치밀한 검증과 토론의 시간을 가진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맡겨진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성가신 역할일까를 생각해보니 측은한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아무튼 남한의 방문자들이 평양 시내를 향해 불쑥 카메라를 들이대는 일, 북한정책이나 최고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적 화제들은 절대금지사항이었지요. 오로지 그들이 안내하는 곳으로만 가야하고 결코 시내풍경을 촬영할 수 없었습니다. 그 무렵 아리랑축전을 앞두고 평양시내 각급학교 학생들이 뙤약볕 속에서 집단체조나 매스게임을 위한 훈련을 하는 광경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지친 학생들을 이끌고 통제하는 지휘선생의 앙칼진 확성기소리가 귀에 따갑게 들려왔습니다.

한번은 평양의 외곽지 군부대 앞을 지나는데 초소를 지키는 인민군병사의 체구가 너무 작고 왜소해서 애잔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요. 묘향산을 향해 달리는 한산한 고속도로 길목의 농촌마을에는 땔감을 장만해서 다발로 만들어 등에 지고 가는 아낙네와 저물어가는 저녁 무렵 소달구지에 몸을 싣고 집으로 가는 노인의 모습도 보였고, 강물에서 첨벙거리며 물놀이하는 어린이들의 정겨운 모습도 보였습니다.

북한방문 여러 날, 어딜 가나 제한된 경로와 구획된 설정 속에서 며칠 지내다 왔습니다. 여행이라 하지만 행동의 자유가 극히 제한된 여정이 도무지 즐거울 리 만무했습니다. 호텔 숙소 안에서의 대화도 도청이 되니 대화를 극히 조심하라는 누군가의 전언(傳言)까지 있었습니다. 이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가 너무 싫고 못마땅해 나는 독한 술을 여러 잔 마시고 몹시 취한 상태로 비몽사몽 속에서 그토록 귀한 북한방문일정을 대부분 날려버리고 말았지요. 맨 정신으로는 결코 견딜 수 없는 어떤 어눌함, 거북함, 답답함 같은 것이 줄곧 가슴을 옥죄어 숨쉬기조차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술에서 깨면 평양 보통강변에 세워진 ‘보통강 려관’ 숙소의 베란다 난간에서 평양시내 풍경과 분주히 오가는 시민들의 행렬을 그냥 먼발치로 멀뚱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숙소 밖 외출은 일절금지였습니다. 호텔 문 앞에라도 잠시 나가볼 요량으로 지인 한 분과 용감하게 진출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정문초소 부근의 숲에서 한 사내가 돌연히 나타나 우리의 외출을 단호하게 가로막았습니다. 그 사내는 숲에 숨어서 투숙객 중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외출시도자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플리커

이젠 아무 곳도 갈 데가 없어졌네요. 무료함을 달래려고 호텔 내부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다가 지하 1층에서 뜻밖에도 ‘가라오케’라 표시된 곳을 발견했습니다. 불같은 호기심이 발동해서 주저 없이 들어갔지요. 무역중개상으로 보이는 북한주민 서넛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남자 셋, 여자 하나였는데 인민복을 입고 있는 폼이 노동당원으로 다소간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계층인 듯 보였습니다.

나는 우선 맥주부터 한잔 주문했습니다. 대동강맥주란 상표와 북한 특유의 글씨체가 이색적으로 눈에 들어왔습니다. 맥주보리 호프의 맛이 진하게 느껴지는 북한맥주 맛은 맥주의 본고장 독일맥주의 향취와 비슷했습니다. 주변풍경들이 차츰 눈에 들어오자 나는 탁자 위에 놓인 두툼한 곡목책자를 발견하고 무릎 위에 얹어서 천천히 한 장씩 넘겼습니다. 거의 대부분 처음 대하는 북한가요였지요.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 공산당과 사회주의에 대한 치적이나 예찬이 주제의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광경은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학에서 북한문학 강의를 위해 자료준비를 할 때 보았던 북한문단의 동향과 북한 시작품의 일반적 경향을 통해 환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다만 문학이나 가요장르의 선호주제가 서로 다르지 않고 오로지 일치된 하나로 부합된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선곡목록 책자의 뒷부분에서 놀랍게도 눈에 익은 정겨운 제목들을 보았습니다. ‘목포의 눈물’ ‘눈물 젖은 두만강’ ‘찔레꽃’ ‘선창’ ‘홍도야 우지마라’ ‘애수의 소야곡’ ‘황성옛터’ ‘꿈꾸는 백마강’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등등. 이 반가운 노래들이 어떻게 북한 가요방 선곡집에 들어 있다는 말인가? 너무도 놀랍고 반가워서 다시금 뒤적이고 또 뒤적였습니다.

물론 ‘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최창호, 평양출판사, 1997)와 ‘계몽기가요선곡집’(평양 문학예술종합출판사, 2001) 등의 자료를 통해 북한에서도 식민지시대 가요작품에 대해 선별적으로 공개하고 가창(歌唱)과 연구, 자료수집 등을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진작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평양의 가요방 시설에서 그것을 눈으로 보게 되니 감회는 특별하게 느껴졌습니다. 북한에서는 가요사 초창기 노래들을 특히 중시하고 제국주의 통치에 반발하며 저항의식을 지녔던 가요작품들을 골라 ‘계몽기가요’란 장르로 분류하여 그대로 인민들이 부를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우리 민족의 대중음악사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나에게 있어서 그나마 이것이 가장 커다란 성과였습니다.

2015년 10월 열린 남북 이산가족 상봉 1차 행사에서 수십년만에 얼굴을 마주한 이산가족이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눈물흘리고 있다. ©통일부

금강산관광이 중단되기 전이었던 2007년, 나는 대학의 연구소 식구들과 더불어 폭설로 뒤덮인 금강산을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마침 금강산호텔에서 열린다는 무대공연이 있어서 그걸 보러갔다가 여유시간이 남았지요. 호텔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는데 마침 2층 레스토랑 출입문이 빠끔히 열린 곳에서 여성이 부르는 낭랑한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소리를 따라서 가보았더니 젊은 여성복무원 하나가 가요방기계를 틀어놓고 혼자 ‘찔레꽃’(김영일 작사, 김교성 작곡, 백난아 노래)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두성으로 부르는 고음의 북한식 창법이었지만 독특한 정감이 느껴지고 듣기에 좋았습니다.

그녀가 1절을 부른 뒤에 내가 자청해서 2절을 불렀지요,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남북합작(南北合作)이 바로 그 순간 금강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재미있고 행복했던 추억인지요. 그날 나랑 ‘찔레꽃’을 함께 부른 북한의 그 여성복무원이 지금도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그날 불렀던 ‘찔레꽃’을 다시 한 번 흥겹게 혼성듀엣으로 불러보고 싶어집니다.

노래와 음악을 함께 누리는 것은 참 즐겁고 흐뭇한 일입니다. 노래를 듣거나 부를 때엔 가슴 속에서 그 어떤 적대감이나 갈등, 분열, 분노 따위도 감히 접근하지 못합니다. 그저 흥겹고 정겨운 마음으로 바뀌며 일체감, 조화의 세계를 향해 서로 협조하고 소통하며 닫혔던 마음이 활짝 열리는 놀라운 변화를 이룹니다.

지난 9월 제35회 이산가족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이산가족과 실향민들이 고향 땅에 있는 가족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닦고 있다. ©포커스뉴스

남과 북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만 합니다. 남북이산가족 상봉일정에서 노래가 얼마나 소중한 도구로 큰 역할을 하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가수 조용필은 2005년 평양공연에서 ‘홀로아리랑’(한돌 작사, 작곡)을 그날의 피날레 곡으로 열창했지요. 그날 공연을 관람했던 평양시민 모두가 일어나 큰 소리로 ‘홀로아리랑’을 합창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이후 북한에서는 ‘홀로아리랑’이 새로운 인기곡으로 방송에서도 심심찮게 흘러나온다고 하지요. 이 노래를 북한에서는 ‘독도아리랑’이란 제목으로 바꿔서 부른다고 합니다. 대중음악분야의 전문가들은 남북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을 수집 정리하여 널리 보급하고, 아무쪼록 많이 부를 수 있도록 한층 노력해야 합니다. 각종 행사, 스포츠, 만남의 자리에서 남북이 함께 노래를 부르는 시간을 반드시 넣어야 할 것입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라디오프로 ‘남북이 함께 부르는 노래’는 현재 분단체제 속에서 진행되는 작은 활동입니다. 그러나 이 방송의 효과는 필시 분단의 골 깊은 장벽을 허물고 그 속의 빙하처럼 단단한 어둠까지 서서히 녹아내리게 할 것입니다. 노래와 정겨운 대화가 빚어내는 그 뜨거운 힘과 위력을 우리는 믿습니다. [오피니언타임스=이동순]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   

  계명문화대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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