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혜탁의 대중가요 독해영역➃] 강산에 <천천히 걷는다>

“천천히 더 천천히
길을 걷다 보면
잃었던 그 하늘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강산에 <천천히 걷는다>

느림이 죄악시되는 사회입니다. 천천히 걸으면 혹시나 도태될까 우려하곤 합니다. 끝없이 증속(增速)하기만 하는 빠르디 빠른 이 세상에서 우리는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질주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빠름을 상찬하는 이 부박한 사회에 최소한의 여유마저 헌납해버립니다. 잠깐의 느긋함도 사치라고 생각하고, 느림을 개인의 성정(게으름)과 연결 짓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잃었던 그 하늘을 다시 볼 수 있을” 리 만무합니다.

“속도에 익숙한 몸에 가장 큰 고문은 ‘기다림’. 한국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은 심하게 마모되어 있다.”
- 진중권 <호모 코레아니쿠스>

오랜 독일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미학자 진중권 교수. 독일의 시간과 속도에 익숙해져 있던 그는 귀국 후 얼마간은 한국사회의 ‘속도전’에 적응을 못합니다.

지하철 표를 사기 위해 창구까지 1미터를 접근하는 그 찰나에 뒷사람들이 그를 가볍게 제친 후 재빠르게 손을 경쟁하듯 창구에 집어넣습니다. 그는 “이 가공할 속도에 압도되어 몸이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립니다.

“어렵게 올라탄 버스는 늘 급출발에 급정거다.(…) 내 발이 버스 문의 발판에서 떨어지자마자 문도 안 닫은 채 버스가 출발을 해버린다. 그때 단 0.1초라도 늦었다면, 아마 내 몸은 허공을 날았을 것이다.”
- 진중권 <호모 코레아니쿠스>

사실 버스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제도, 문화, 정책 등도 “늘 급출발에 급정거”입니다. 모두가 그 놈의 ‘빨리빨리’만 외치면서 생긴 결과일 것입니다. 진 교수는 “버스의 작동을 인간의 생체 리듬에 맞추는 게 아니라, 인간 생체의 움직임을 버스의 속도에 맞춘다”고 꼬집었습니다.

©픽사베이

“한국의 버스는 인간을 고려하지 않는다. 거꾸로 인간이 버스의 편의를 배려한다. 빨리 달리고 싶어하는 버스를 위해 인간의 몸은 신속히 승차하고, 신속히 하차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지체할 경우 운전석에 앉은 인격화한 버스에게 종종 욕을 들어 먹는다.”
- 진중권 <호모 코레아니쿠스>

인격화한 버스에게 욕을 들어 먹는다는 표현을 딱히 반박할 수 없어 씁쓸한 감정은 느끼던 와중에, 뒤이은 그의 문장이 비수를 꽂습니다. “이때 다른 승객들도 내심 버스 편이다.”

덴마크는 여러 조사, 각종 보고서에서 행복지수 최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덴마크의 ‘행복 여행가’ 말레네 뤼달(Malene Rydahl)은 어린 시절부터 ‘나쁘지 않아’, ‘충분히 좋아’, ‘잘 될 거야’ 등과 같은 표현을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표현은 “삶에 현실적인 기대를 하는 덴마크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잘 나타낸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 이는 현실에 안주하는 것과는 분명 다릅니다.

“현실주의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즐기면서 길 위의 장애물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태도를 말한다.”
- 말레네 뤼달 <덴마크 사람들처럼>

이런 식의 ‘현실주의’를 우리도 일정 부분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지금도 ‘충분히 좋아’라고 말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길 때, 우리의 신체와 정신을 사방에서 사로잡는 가속도 경쟁의 강도를 조금씩 완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구 사회의 느림은 게으름도 아니고, 비효율도 아니고, 경쟁의 배제도 아니고, 역동성의 결여도 아니다. 그저 속도의 다른 차원일 뿐이다. 그리고 삶은 전쟁이 아니다.”
- 진중권 <호모 코레아니쿠스>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가 우리의 경제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측면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계량 가능한 수치로, 속도로 표현하는 양적 경쟁에만 매달리는 것은 곤란합니다. 진 교수의 말마따나, 삶은 전쟁이 아닙니다.

©플리커

그렇다고 이 글에서 무작정 느림을 예찬할 생각도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아래 강산에의 노래 가사가 낯설어질 정도로 속도전에 매몰되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바삐 가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걷는다.”
- 강산에 <천천히 걷는다>

바쁘기만 한 내 걸음에 휴식시간을 주세요. 길거리에서 처음 대면하는 사람들과도 꼭 누가 누가 빨리 걷는지 겨루는 양 벌이는 무의미한 수고는 이제 좀 덜었으면 좋겠습니다. 천천히 걸으며, 잃어버린 하늘을 빤히 올려다보는 충일한 시간을 스스로에게 허락하시기 바랍니다.[오피니언타임스=석혜탁]

 석혜탁

 대학 졸업 후 방송사에 기자로 합격. 지금은 모 기업에서 직장인의 삶을 영위. 
 대학 연극부 시절의 대사를 아직도 온존히 기억하는 (‘마음만큼은’) 낭만주의자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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