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안의 동행]

[오피니언타임스=최선희] 인권을 짓밟는 것은 곧 살인이다. 인권이 손상되는 일은 여러 곳에서 자행되고 있지만, 직장을 중심으로 노동과 인권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 한다. 직장이란 딜레마다. 취업을 못 해도 문제고, 해도 문제다. 안 다닐 때는 다니고 싶고, 다닐 때는 다니기 싫다.

취업 전: 회사나 가고 싶다.
취업 후: 회사 나가고 싶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거지 OR 노예’ 유머 ©인터넷커뮤니티

우리는 저마다 일을 하며 각각의 고민을 안고 살지만 때론 같은 생각, 같은 고민을 한다.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도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고, 중소기업에 다니는 사람도 스트레스를 해소할 곳을 찾아 헤맨다. 오죽하면 대나무 숲이라는 공간이 마련됐을까. 많은 사람들이 매일 같이 이직을 생각한다.

로테이션 근무나 스케줄 근무를 하는 사람들,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남들 쉴 때 일하고 남들 일할 때 쉬는 사람들과 프리랜서. 프리랜서들은 누가 나를 출퇴근하게 해줬으면 한다. 자유란 책임의 부재가 아닌 항상 책임을 안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만나서 우리만의 이야기를 나누기보다 각자의 설움을 토로하기 바쁘다. 서로 각자의 힘든 이야기를 하며 간단한 위로를 나누고 서로를 부러워하기도 한다.

이쯤되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것도 능력이고, 천부적인 재능인 것이 맞다.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더 해야 하는 것일까. 공부하고, 일 하고 살아가기 위하여,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가족과 같은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 청춘도 치솟는 물가에, 빚에 의해 반납해야 한다. 사회 초년생들은 몇년 간 학자금 대출금을 갚기 위해 일한다. 서민층에서는 “빚 없으면 부자고 성공한 것”이라는 말이 한숨과 함께 나온다.

이렇게 일하며 지내다 보면 어느 순간 누구나 슬럼프에 빠진다. ‘이 길이 맞는가. 제대로 가는 걸까. 정말 이 일이 내가 원하던 일인가.’ 우리가 이따금 이런 대화를 나눈다.

반전 바른생활표어

“살고 싶지 않다.”
“누구는 살고 싶어서 살겠니?”

무엇을 위해, 왜 살아가는 것인지도 잊은 채 살아간다. 살아갈수록 적립되는 것은 없고 사라지는 것들 뿐이다. 직장인들에게 주말이 지나가는 체감 속도는 매우 빠르다. 주말 없이 일 하거나 매일 같이 야근에 시달리는 사람도 많다. 늦게까지 퇴근 않는 망부석 상사 덕에 눈치 보여 강제 야근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연장 근무로 철야 작업을 해도 야근 수당 또는 심야 수당을 제대로 받지 못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돈 버는 만큼 일하게 되어 있다. 월급은 카드빚이나 각종 대출금을 갚기 위해, 생활비 명목으로 통장을 스쳐 지나간다. “내 돈인데 왜 내 손에 쥐지를 못하는가.”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한 전사처럼 뛰어다님으로 인하여 사회는 소통하고 공감하는 평화로운 공간이 아닌 킬링필드가 되어버린다.

인터넷 검색 창에 ‘9포세대’라는 말을 쳐보면 국어사전 단어로 등재 되어있는 9포세대의 정의가 나온다. 사전적 의미의 9포세대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세대를 넘어 내집마련, 인간관계, 꿈, 희망, 건강, 외모도 포기하는 세대를 일컫는 신조어’라고 적혀 있다. 포기할 것들은 점점 늘어 3포세대→ 7포세대→ 9포세대로 진화했다. 살면서 늘어가는 것은 한숨과 포기할 것들이다. 꿈과 사랑, 소중한 것을 이루겠다는 목표 옆에는 항상 ‘여유가 된다면’이란 조건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직장에서 대인관계 스트레스는 일과 별도로 덤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변덕쟁이 상사는 지위와 권력으로 우월감을 과시한다. 우기기와 일 떠넘기고 빠지기, 잘 되면 내 탓-안 되면 남 탓 하는 바람에 여러 부하직원을 울린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속담은 통하지 않는다. 평등은 규모와 상관없이 회사 안팎 세계 모든 곳에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때때로 거래처 사람의 욕받이 무녀가 되거나 박봉을 감수하며 격무에 시달린다. 회식 역시 근무의 연장일 때가 많다. 직장인들은 어떻게, 언제 도망칠까 묘수를 짜내느라 바쁘다. 언제나 옳은 말은 “출근은 이르고, 퇴근은 느리다”이다.

©MBC 방송 캡처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지”, “남의 돈 벌기가 쉽나?” 맞는 말이다. 세상에 모든 일이 어렵다. 그렇지만 최소한의 인권은 존중 받아야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지인이 겪은 인권 침해 사례를 소개한다.

통신사 엔지니어 A는 평소 전봇대를 오르는 험한 일을 했다. 쉬는 날도 1년에 손꼽을 정도로 적다. 업무량과 업무의 혹독함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월급을 받는다. 쉬는 날도 갑자기 출근 통보를 하기도 한다. 몸살에 걸려도, 일하러 가는 도중에 교통사고가 나도 회사 측은 출근하라고 종용했다.

A는 최근 양계장에 설비를 위해 방문했다. 그곳의 주인 B는 일하는데 방해된다며 괜한 신경질을 내며 AI 방역 소독약 제거액을 A에게 뿌렸다. 엄연한 테러이다. AI 방역 소독약 제거액이 A의 눈 안에 들어가 병원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다. 통신사는 병원비를 비롯한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았고 그저 참으라고 말했다. 다시 그 곳에 가서 작업하고 오라는 명령도 하달했다. 게다가 기업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까봐 쉬쉬하고 피해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나 보상도 없이 사건을 재빠르게 무마하고 넘겨버렸다.

개인의 실수나 잘못으로 회사에 손실이 가면 종종 소송으로까지 이어진다. 반대로 회사의 잘못으로 개인에게 피해와 손실이 가면 비밀로 묻힐 때가 많다. “무서운 회사였다” A씨의 말이다.

©픽사베이

제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한 사람들이 사회나 회사의 높은 자리에 군림하면 그곳의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된다. 회사의 이익도 중요하지만 생업에 종사하는 직장인들은 최소한의 인격을 존중받아야 한다. 이러한 권리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다. 특정한 누군가만 누리는 특권이 아니다. 듣기 싫은 소리를 참아내고, 하고 싶은 말을 삼키는 것이 일반화돼서는 안 된다.

성희롱과 성추행 문제도 노동과 인권 문제에서 빼놓을 수 없다. 성추행은 피해자는 비단 여성뿐 아니라 남성이 될 수도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동성일 때도 발생한다. 외모에 대한 칭찬도 눈빛과 시선 처리, 어감과 같은 비언어적인 표현에 의해 성희롱이 될 수 있다. 외모 비하와 같은 인신공격도 인권을 부수는 행위다.

묻고 싶다. 공적인 관계에서 굳이 그런 말과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약자는 모든 것을 가슴에 묻고 소리를 지우고 가만있어야 한다.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러도 벽에 부딪혀 되돌아 올 뿐이다. 문득 황인숙 시인의 ‘삶’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왜 사는가?
왜 사는가……
외상값.

 최선희

  건축회사 웹디자인 파트에서 근무 중인 습작생.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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