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호의 멍멍멍]

대한민국에선 싫다는 여성의 팔을 잡아 벽에 밀쳐놓고 ‘사랑한다고!’ 소리치며 입 맞출 줄 알아야 ‘상남자’라고 여기는 왜곡된 문화가 있다. 사실상 범죄지만 가부장제로 대표되는 성차별 사회는 이들을 ‘박력남’이라 부른다. 이런 행위는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미화되는 동시에 확대, 재생산돼 성차별에 둔감한 사회를 만든다. 누군가 문제제기해도 ‘드라마는 드라마로 봐라’, ‘너무 예민한 거 아니냐’는 반응이 돌아온다. 오히려 남자가 여자를 그냥 보내는 모습을 내보냈다면 ‘답답하다’, ‘남자답지 못하다’는 비아냥에 시달린다.

©픽사베이

남자·여자다움이 성차별을 유지한다

‘남자답다’는 건 ‘가부장적’이라는 의미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소유의 대상으로 여긴다. 가부장적 사회 풍토에서는 여성 비하 발언에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남자끼리 모인 자리나 남자 카톡방에서 언어 성폭력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여성 비하 발언은 자신이 가부장제에 적합한·적응한 남자라는 걸 알리고, 다른 남자들도 가부장제에 잘 적응했는지 확인하는 역할을 한다. 비하 발언에 동의하지 않는 남자들은 가부장제를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해 대화에서 배제·소외시킨다. 물론 가부장제라는 표현은 부정적 느낌이 들기 때문에 ‘남자답지 못하다!’고 돌려 말한다.

‘남자가~’, ‘여자가~’로 시작하는 이야기들도 사회가 요구하는 성 역할을 강요한다. ‘여자가 조신해야지’, ‘남자가 힘이 세야지’처럼 말이다. 성별(sex)에 따라 요구되는 성 역할(gender)은 성차별적인 조건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여성 : 남편 말을 잘 따를 것, 육아와 양육에 전념할 것, 외모를 가꿀 것, 조신할 것 등
남성 : 돈을 잘 벌어 올 것, 위엄이 있을 것, 힘이 셀 것, 결단력이 있을 것 등

가부장제는 이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에게만 ‘여성스럽다’, ‘남자답다’고 인정해준다. 이 틀에서 벗어나면 ‘여자답지 못하다’, ‘여자가 기가 세다’, ‘남자답지 못하다’, ‘남자가 무슨 집안일이냐’ 등의 뒷말이 나온다. 특히 배신자들에게는 거센 위협이 가해진다. 여성 비하를 거부하는 남성들, 혹은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남성들은 적극적인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가부장제를 유지하는 데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이광호

언어는 사회를 반영한다

언어는 사회를 반영한다. 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확장시킨다. ‘여성혐오’라는 단어 사용이 늘면서 성차별, 여성, 성 소수자 인권 논의가 확대된 것이 그 예다. 하지만 동시에 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제한한다.

예컨대 ‘양성평등’이란 단어를 보자. 이는 차별을 없애자는 좋은 취지의 표현이다. 그러나 자칫 태어날 때 정해지는 두 가지 성별만 인정하는 것으로 본래 의미가 왜곡될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 사고는 트랜스젠더, 무성애자, 양성애자, 동성애자 같은 성적 지향이나 성 정체성이 끼어들 틈을 원천 봉쇄한다. 혹여 양성평등이 성 소수자들의 권리 신장도 포함하는 것이고, 용어는 관습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싶다면 차라리 ‘성평등’이라 하는 게 낫다.

“모든 남자는 잠재적 범죄자”라는 표현도 문제가 있다. 당장 모든 남자를 범죄자, 성차별주의자로 몰고가느냐는 비난이 나올 수 있다. 성별이 남자라 해도 성차별·가부장 사회를 거부한다면 성차별주의자가 아니지만, 구체적 설명 없이는 오해를 부르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남성은 잠재적 범죄자’라는 문장의 남자는 ‘성차별주의자’ 같은 좀 더 적확한 표현으로 대체돼야 한다.

©이광호

언어 없는 페미니즘은 없다

여성혐오라는 단어도 본래 의미가 축소됐다. 광범위한 반여성적인 편견을 뜻하는 미소지니(misogyny)가 ‘여성혐오’로 번역되면서 오직 ‘혐오’에만 방점이 찍히는 것이다. 예컨대 가부장적인 남성에게 ‘여성혐오’ 문제를 지적하면 이런 반응이 나온다. “내가 여성혐오라니 무슨 소리야? 나 여자 좋아하는데?”

일각에서는 여성혐오라는 단어가 주는 직관적인 불편함이 기득권의 반발과 비판을 손쉽게 끌어냈다고 강조한다. 그 덕분에 페미니즘이 사회적 의제로 급부상할 수 있었다는 평가다. 불편함을 위한 전략적 단어 선택이었기에 번역의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은 나름 일리가 있다. 온건한 표현, 온건한 주장만으론 가부장제라는 성차별 사회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여성혐오라는 단어의 선택이 ‘의제 전파’ 이후에도 계속 유효한 전략인지 의문이 든다. 작가 이민경이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란 책에서 말한 것처럼 “용어 문제를 거론하는 건 그냥 ‘알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방패”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여성혐오라는 단어는 보다 적합한 단어로 수정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차별주의자를 막던 방패가 어느새 무기가 되어 공격의 빌미가 될지도 모른다.

길가에 자라는 이름 없는 풀들을 잡초라 부른다. 이들은 이름이 없기에 존재를 부정당하고 뭉뚱그려진다. 본질을 보려 하지 않는 자들이 번역 문제, 언어 문제를 가지고 트집을 잡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적확한 언어에 대한 고민은 지속돼야 한다. 본질에 접근하기 위한 열쇠는 언어에 있다. 변화를 위해 끊임없이 이름 짓고, 수정하고, 고민해야 한다. 페미니즘은 ‘무엇’을 ‘어떻게’ 부를지의 싸움이다. [오피니언타임스=이광호]

 이광호

 똑같은 사람이 될 것만 같은 두려움에 글을 씁니다. 게임 좋아합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