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진의 소중한 사람]

방에서 네 발로 기어 나와, 거실바닥을 열심히 굴렀다. 식은땀인지 눈물인지 어느 순간부터 구분이 되지 않았다. 삼일 전 싸운 동생이 업고 뛰었다. “누나 내가 다 잘못했어”하면서 울었을지도 모르는데, 너무 아파서 기절하느라 그 장면을 놓친 것이 가장 아쉬웠다.

급성 장염이었다. 이틀을 꼬박 굶은 후 퇴원 길, 의사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당분간 죽을 드시는 것이 좋고, 기름기를 피하며 이후에도 규칙적인 식생활을 하셔야한다고.

나는 이틀을 굶었지만 엄마가 끓여준 죽은 맛이 없었다. 동네 피자집의 감자피자가 간절했다. 자꾸만 침이 고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열망은 갈망으로 변했다. 배가 고파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에 피자집 전화번호를 누르려는 순간, 켜둔 텔레비전에서 아나운서가 말했다.
“지금 현재 경기지방 한파주의보 발령됐습니다.”

창작 판소리극 ‘방탄철가방-배달의 신이 된 사나이’ 공연의 한 장면. ©광주문화재단

우리 집은 경기도 일산이다.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럴 수는 없었다. 배달이 아니고서야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팔 다리에 기운이 없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도저히 직접 운전해 피자 사러 나갈 자신이 없었다. 가족들에게 부탁해도 잔소리만 듣고 끝날 것이 뻔했다. 난 그렇게 심한 멍텅구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한파주의보가 내릴 만큼 추운 날씨에 이 시린 바람을 뚫고 피자한판을 가져다 달라고 주문전화할 용기는 없었다.

방안을 맴맴 돌았다.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더 먹고 싶었다. 배가 고프고 너무 먹고 싶어서 눈물이 났다. 이렇게 추운데도 나만 배부르겠다고, 바로 포기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나를 자아비판하기 시작했다. 비판을 지나, 내 자신이 실망스럽고, 급기야 슬퍼지려고 할 때 나는 주먹을 말아 쥐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결연하게 부엌으로 나가 죽이 아닌 밥을 가득 퍼 담았다. 그리고 진정한 평화는, 밥 위에 김치를 올려서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드디어 찾아왔다. 일단 배가 부르니 견딜 만 했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친구 J를 생각했다. 그 친구가 이곳에 있었다면, 이 한파에 배달을 자제해야만 하는 온갖 이유를 궁리하며 방안을 뱅뱅 돌던 나를 매우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았을 것이다. J와 나는 학교를 여러 군데 다녔다. 학교 울타리 안에 오래있었다. 당연히 사회에 나오는 나이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부끄럽게도 부모가 늙어가는 줄도 모르고 오래도록 등골을 빼먹었다. 그렇게 내 배를 채워 놓고도 꿈을 놓지 못해 방황을 했다.

이제야 밥벌이는 하는데, 벌도 함께 받는다. 부모 앞에서는 죄인이다. 부모의 노후를 나의 노후처럼 책임져야 한다고 나는 매일 거울을 보며 다짐한다. J는 나보다 조금 더 죄인이 되었다. 늦게나마 취직 잘 되었다고 그 친구네 엄마가 호호 웃으시며 좋아하던 직장을 그만두고 음식점을 차렸다. 혹시 내 친구 J가 볼지도 모르니 그 애가 퇴직금을 모두 투자하고도 부족한 자금을 어떻게 동원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다만 다행히 J네 음식은 무척 맛이 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J는 꼭 성공해야한다. 꼭이다. 그만큼 J의 어깨는 무겁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J의 가게는 배달도 한다는 것이다. 바쁠 때면 사장인 J도 배달을 자주 간다.

©픽사베이

어떤 손님이 조금 전의 나처럼 한파에 어떻게 배달을 시키느냐고 많은 고민 끝에 배달의사를 접으려고 한다면, 아마 J는 걱정 마시라고, 어떻게든 가져다 드린다고 발벗고 나서서 원동기 헬멧을 쓸 것이다. 내 예상은 틀릴 리가 없다. 왜냐하면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지난여름 폭우가 쏟아지는 저녁, J는 아주 시원한 목소리로 주문을 받아서, 아주 시원한 목소리로 다녀온다고 배달을 나섰다. 그리고 우리 친구들은 보았다. 눈도 뜰 수 없을 만큼 퍼붓는 장대비 속에서 아주 천천히 멀어지는 J의 뒷모습을. 아주 한참 후에 물에 푹 담궈진 J가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그전까지 하던 심한 농담도 하지 않았고, 마치 아침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결의에 찬 전사들처럼, 뭔가 서로를 아주 경건하고 공손하게 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J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야, 다시 비로소 아주 시끄러운, 몹쓸 친구들로 돌아갔다.

불현듯 배달부들께 감사한 마음이 든다. 배달되어진 것이 무엇이든. 내가 얼마나 당신에게 감사하는지. 배곯은 나를 굶주리지 않게 하시고,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우리 집 문 앞까지 와주시는. 항상 친절하신 분들. 고맙습니다. [오피니언타임스=이수진]

 이수진

 영어강사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감사합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