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웅의 촌철살인]

루마니아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다는 소식이 귀에 쏙 들어왔다. 나라밖 뉴스가 평소보다 각별하게 들린 건 감정이입 탓 같다. 시민 수십만 명이 참가했다는 사실이 한국에서 목하 진행 중인 촛불집회와 겹쳐보였다.

루마니아 시민들이 정부의 ‘부패사범 사면 행정명령’에 반발해 내각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플리커

시위의 발단은 지난달 말 정부가 발표한 부패사범 사면에 관한 행정명령이었다. 시민들은 그 철회를 요구했다. 시위가 연일 이어지자 정부는 굴복해 행정명령을 폐지키로 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내각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이번 시위는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대통령을 귄좌에서 몰아낸 1989년 민주화 시위 이후 가장 큰 규모다. 지난 5일에도 수도 부쿠레슈티만 30만, 전국적으로 50만 명이 모였다. 눈길을 끈 것은 그 ‘역대급’ 규모만이 아니다. 시위의 원인과 배경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우리와 비교됐다.

추운 날씨 속에 부쿠레슈티 정부청사 앞 광장에 몰려든 시민들이 주장한 것은 반부패였다. 최근 집권한 사회민주당(PSD) 연정은 교도소 과밀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대대적 사면안을 추진했다. 내용은 징역 5년 이하의 기결수와 직권남용에 따른 국고 손실액이 20만 레이(약 5500만원) 미만인 범죄자를 사면한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뛰쳐나와 ‘도둑들’, ‘정부 퇴진’ 등 구호를 외쳤다. 사면안이 부패 정치인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행정명령이 시행되면 부패 혐의자 다수가 사면 받을 것인데, 그 가운데는 리비우 드라그네아 PSD 대표도 끼어 있다. 그는 지난해 투표조작 혐의로 집행유예 판결을 받아 총선에서 승리하고도 총리직에 오르지 못했다.

루마니아 시위와 촛불집회의 공통점은 바로 이 지점, 반부패다. 촛불집회를 촉발시킨 것은 최순실의 국정농단이었다. 최순실은 박근혜 대통령을 움직여 재벌들에게서 큰돈을 뜯어냈다. 권력을 등에 업고 사익을 도모한 최씨의 국정농단도 크게 보면 부패문제다. 두 나라 시위의 공통분모가 부패인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촛불집회에 참석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포커스뉴스

어느 사회나 부패는 뿌리가 깊다. 루마니아도 그렇다. 차우셰스쿠 독재 시절을 빼고는 이 나라 부패를 얘기할 수 없다. 그는 24년간 공산당 서기장과 대통령을 지내면서 지독한 족벌정치와 공포정치를 자행했다.

둘째 아들 니쿠는 일찍이 후계자로 지목됐고, 일가친척 40여 명이 행정부와 공산당 요직을 차지했다. 세쿠리타테라는 거대 비밀경찰 친위조직을 키워 국민생활을 일거수일투족 감시했다. 인구 2100만에 도청센터만 1000개, 도청기만 320만개가 있었다고 한다. 반체제 작가 알렉산드루 이바시우크는 “한 미치광이의 공상 속에 2000만 명이 사는 나라”라고 비판했다.

이런 나라에서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무리한 산업화와 대량 수출, 일방적 수입규제 정책은 국민 생활수준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복지는 실종됐다. 마침내 유혈혁명이 일어났고 차우셰스쿠는 권력 서열 2인자였던 부인과 함께 처형당했다.

이 긴 철권통치 기간에 부패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우리도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독재기간 중 고질적 정경유착 관행이 뿌리내렸다.

12월17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인근에서 보수단체 회원들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 참석해 구호를 외치고 있다. ©포커스뉴스

다른 공통점도 있다. 루마니아에는 지금도 차우셰스쿠 시대에 대한 향수를 토로하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중장년층들로, 그 시절이 지금보다 좋았다는 것이다. 한국에는 박 전 대통령을 구국의 영웅으로 존숭하는 사람들이 건재한다. 또 그 딸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기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태극기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들도 많다.

1989년 12월 25일 차우셰스쿠는 군사법정에서 마지막까지 “루마니아 국민을 배려해 사력을 다했다”고 우겼다. 무자비한 시위대 유혈 진압을 그렇게 합리화한 걸까. 이 태도는 재판장에게도 크게 미움을 샀다고 한다. 형은 당일 집행됐다. 박 대통령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국정농단 사건은 거짓으로 쌓아 올린 산”이라거나 “누군가 오랫동안 기획한 느낌”이라며 잘못을 부인하고 잡아뗐다. 이 대목에서도 두 사람의 태도는 닮았다.

그러나 두 나라 정치인들이 판이하게 다른 부분도 있다. 부쿠레슈티에서는 2015년 10월 나이트클럽 화재로 60명 이상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때도 사고가 공직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 때문이라는 여론이 폭발해 거센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자 당시 총리는 “사고 책임이 고위관리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며 내각이 총사퇴했다. 세월호 참사는 1000일이 넘도록 진상 규명이 안 되고 대통령의 당일 행적도 오리무중이다.

정부가 사면안을 철회했음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자 친정부 맞불시위도 고개를 들고 있다고 한다. 청와대는 특검의 적법한 압수수색영장 집행을 거부했다. 촛불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이렇게 두 나라의 시위 양상에는 닮은 꼴과 다른 꼴이 섞여 있다. 한데 닮은 꼴보다 다른 꼴이 더 의미심장해 보인다. 우리의 민주주의 역량이 루마니아만도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살짝 든다. [오피니언타임스=김철웅]

   김철웅

    전 경향신문 논설실장, 국제부장, 모스크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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