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호의 멍멍멍]

대한민국 형법 제53조는 ‘작량감경’에 대한 조문이다. “범죄의 정상에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는 때에는 작량하여 그 형을 감경할 수 있다”는 간단한 내용인데, 작량감경보다 ‘정상참작’이라는 표현으로 자주 쓰인다. 법에도 눈물이 있다는 취지로 시작되었지만 횡령이나 비리를 저지른 재벌 총수에게 주로 적용되어 빛바랜지 오래다. 죄를 지었어도 수출 많이 하고,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 점 등이 참작되면 형량이 줄어든다. 오죽하면 재벌 총수의 재판은 수사 이전부터 “국가 발전에 기여한 점을 고려하여 집행유예를 선고한다”는 판결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픽사베이

국가발전과 경제성장은 중요하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국가이기 이전에 민주주의 국가다. 헌법 119조 2항이 말하는 것처럼 국가는 ‘균형있는 성장’과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해야 한다. 경제성장과 국가발전이라는 경제논리가 법치주의와 정의에 우선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법에 의한 심판이 엄격하게 적용되는 건 돈 없고 힘없는 일반 국민들이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사회적 신분에 의한 차별과 사회적 특수계급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대한민국 헌법은 허울뿐인 껍데기로 전락했다.

현실적이지 않다는 말은 경제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민주적 절차, 법적 제도가 갖춰져 있어도 세금을 확보할 방법이 없거나, 막대한 비용이 들거나, 기업에게 큰 부담이 되는 경우에 자주 쓰인다. ‘최저임금 1만원’도 최저임금법에 따라 고용부장관이 결정하는 법적 절차로는 실현 가능하지만 ‘현실성이 없다’는 비판에 부딪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윤을 늘리기 위해 낮은 임금으로 고용하길 원하는 고용주들이 최저임금을 만원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일리 없기 때문이다. 결국 ‘현실성’을 결정하는 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몫이다.

최순실 게이트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 국정조사특위 청문회에 출석한 기업 총수들은 “청와대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미르·K스포츠재단에 돈을 출연했다”고 주장했다. 경제적 득실만 따진다면 기업들의 행동은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경제적 이해관계가 법과 정의보다 우선해서는 안 된다. 돈과 권력에 의해 판결이 달라진다면 그건 법치주의 국가도, 민주주의 국가도 아니다. ‘현실적으로 거절하기 어려웠다’는 기업의 변명은 정치권력과 재벌이 법 위에 군림한다는 사실을 자백한 셈이다.

재벌 총수들이 12월6일 열린 ‘최순실 국정농단 국회 1차청문회’에 출석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이재용 삼성 부회장은 영장 실질 심사 과정에서 피해자일 뿐이라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피력했다고 한다. 물론 청와대에 돈을 빼앗긴 셈이니 피해자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악어와 악어새처럼 그들은 서로 원하는 걸 주고받았을 뿐이다. ‘악어가 입을 닫았으면 우린 죽을 수 있었어!’라는 악어새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정치권력과 돈을 교환한 것이고 ‘이윤 추구’ 행위였을 뿐이다. 기업은 절대 손해 보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자본을 축적한 기업들은 조금 더 편하고 빠르게 돈을 벌기 위해 정부의 권력을 원하고, 정부 권력은 더 쉬운 통제를 위해 자본을 원한다. 기업은 청와대에 자금을 지원하고 청와대는 그 자금을 우파단체에 제공했다는 정황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물론 그 행위들은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했고, 법원은 많은 경우 정부와 기업의 손을 들어줬다. 입법·사법·행정부는 서로를 견제하지 않았고 오히려 부정부패를 동조하고 조장했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특검, 말 그대로 특별한 검사가 수사에 나서야만 했던 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반증이다.

국민들은 경제성장과 국가 성장이라는 신화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조금 불편하고 조금 더 느리더라도 ‘민주주의’ 가치를 지키길 원한다. 그렇기에 재벌 총수를 향한 수사의 칼날이 무뎌져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를 제 멋대로 유린하고 길들이며, 회사의 이익을 추구한 재벌들을 피해자로 남겨두는 건 다시 한 번 민주주의의 가치를 자본에게 양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재벌 총수들에 대한 엄정한 판결이 대한민국이 자본에게 허락받는 허울뿐인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오피니언타임스=이광호]

 이광호

 똑같은 사람이 될 것만 같은 두려움에 글을 씁니다. 게임 좋아합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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